그건 바로 현금
김평범 씨에게 새 여친이 생겼습니다. 알콩달콩 연애를 이어가던 와중, 여친은 평범 씨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 오빠, 살 좀 빼자. 헬스장 등록해서 딱 5kg만 빼면 어때?
- 오빠, 그 옷 너무 자주 입는 거 아냐? 회사 다닐 때도 잘 차려입고 다녀야 좋은 소리 듣지. 쇼핑 가서 옷 좀 사.
- 또 동창들 만나? 술 좀 줄여. 돈도 아끼고, 술배도 들어가고, 얼마나 좋아?
자신을 걱정해 주는 여친의 마음이 고마워서 처음에는 열심히 그 말을 따랐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잔소리를 그치지 않는 여친. 결국 평범 씨는 폭발하고 말죠.
- 야, 내가 뚱뚱하고 옷 못 입고 술 좋아하는 데 네가 뭐 보태준 거 있냐? 잔소리 좀 그만해!!
여친은 도리어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아니, 다 오빠 좋으라고 그러는 거잖아. 오빠의 건강과 외모와 지갑을 걱정해 준 건데. 뭐 나 위해서 그래?"
그래요. 물론 당사자를 위한 것이긴 하죠. 그래도 좀 우쭈쭈 칭찬도 해 줘 가며 북돋아주었으면 좋았으련만, 노력을 당연하게만 여기고 고운 말 한 번 못 해줬으니 폭발할 만도 합니다.
우쭈쭈, 우리 국민들 잘한다! 돈을 주는 정부
이처럼 세상에 당연한 건 없습니다.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옆에서 부둥부둥하며 비행기를 태워줘야 더 노력할 맛이 나지 않겠어요? 오는 게 좀 있어야 가는 것도 있는 법이죠.
사실 유치원생이 받는 '칭찬 스티커'와 시민들이 '보조금'은 성격이 비슷합니다. 바람직한 유치원생이라면, 또 올바른 시민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것들에 우쭈쭈 칭찬 도장을 쾅 찍어 주는 거잖아요. 친구가 넘어졌을 때 와하하하 웃는 대신 달려가서 손을 잡아 주는 건 꼭 칭찬 스티커가 아니더라도 착한 아이라면 응당 할 만한 행동이지요. 하지만 반짝거리는 스티커 하나를 붙여주면 앞으로도 좋은 행동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속세에 찌든 어른에게는 스티커가 뭐다? 네, 바로 돈입니다 돈. 캐쉬.
그래서 바람직한 시민이 좋은 선택을 할 때 정부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나쁜 짓을 하면 벌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뺏어갑니다. 스티커를 뺏기는 아이처럼 어른은 속이 쓰리죠.) 예를 들어 새 차를 살 때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가솔린 차 대신 전기차를 산다? 오케이, 정부가 돈 보태 줍니다. 기후변화를 늦추면 시민들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는 거지만, 좀 더 확실하게 방향을 잡아주는 거죠. 우리는 돈에 궁한 어른들이라, 아무리 바람직한 소비일지라도 가격이 비싸면 손쉽게 지갑이 열리지 않거든요.
김평범 씨도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칭찬 스티커
저는 직업상 이런 기후변화 관련 보조금 정책을 들여다보는 일을 합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정책을요. 몸뚱이는 한국에 있지만 미국 회사 일을 하거든요. 미국 정부는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어떤 식으로 국민들에게 부둥부둥 격려금을 주는지 잘 알게 되었죠.
그런데 일을 하면 할수록, 미국과 한국의 보조금 정책은 참 다른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일단 미국은 완전히 평범한 일반인이어도 누릴 수 있는 혜택들이 많거든요. 즉, 평범한 집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들일 수 있는 평범한 가전제품에 대해서도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단 거죠. 집에 뭐 말도 안 되는 열병합 발전소를 설치하거나 탄소채집장치를 마련하라는 게 아니라, 냉장고나 세탁기, 식기세척기, 온도조절장치 등을 흔한 제품을 고효율 기기로 사면 보조금을 받는 제도가 아주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미국의 주택에서 받을 수 있는 여러 보조금을 조금만 살펴보면,
- 고효율 기기 보조금 (위에서 말한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식기세척기 등)
- LEG 조명 교체 보조금
- 단열 강화 보조금
- 고효율 냉난방기기 보조금 (전력으로 구동되는 히트펌프나 에어컨)
- 수요관리 참여 보조금 (냉난방 수요가 너무 높을 경우 부하 관리를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받음)
- 전기차 보조금
- 태양광 패널 설치 보조금 (미국 집은 주택 형태가 많으므로, 지붕에 붙이는 태양광 패널에 부여)
- 가정용 배터리 보조금 (주로 태양광 시스템에 함께 설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배터리에도 따로 부여)
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저소득이면 전기세 자체를 지원해 주기도 하고, 무이자 할부로 대출을 해주기도 하고요. 연방 정부나 주정부 차원에서는 세금 감면도 흔한데요, 예를 들어 태양광 패널이 붙어 있는 주택에 대해서는 재산세를 감면해 주는 식이죠.
한국에도 있긴 하다고
물론 한국에도 여러 종류의 지원금이 존재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 뇌피셜 많음)
그러나 산업계가 주로 대상이 되거나, 저소득층 등 복지대상자를 겨냥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취약계층에게 부여하는 에너지바우처나 다자녀 가구의 경우 전기세를 할인해 주는 사례가 있겠지요. 모두에게 오픈된 제도로는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경우 현금을 지급하는 '탄소포인트제'라는 제도라는 게 있긴 한데, 얼마나 활성화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의 경우도 여기에 가입하긴 했는데, 아직은 큰 혜택을 보지 못했어요.
게다가 정책 일관성도 꽤나 떨어집니다. 예를 들자면 에너지저장장치(ESS) 관련 제도가 있는데요. 재생에너지 사용 확대에 필수적인 에너지저장장치와 관련하여 정부는 이런저런 지원 사업을 벌여 왔지만, 최근 들어 의무 설치 기준이 대폭 완화되고 뒷전으로 미루며 비판을 받고 있거든요. 미국의 경우 가정용 배터리도 점점 활성화되는 추세인데, 아직 한국의 경우 평범한 김평범 씨가 재생에너지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자체가 없어서인지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의 진행 상황을 보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 스티커를 우수수 붙여 주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요. 평범한 시민들도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실천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 만큼, 좀 더 많은 시민들이 칭찬 스티커(=돈)를 받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재능 기부를 강요하면 갑질인 것처럼
요즘 개인의 탄소 발자국을 줄이자고 사방에서 잔소리가 들리지요.
-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 자전거, 도보를 이용하세요!
- 육류 섭취를 줄이고 채식을 늘리세요!
- 자원 재활용을 위해 업사이클링하세요!
다 좋은 얘기지만, 사실 무조건 이것을 모두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은 자가용이 필요하고, 건강상의 이유로 육류 섭취를 줄이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지요. 어려운 집안 사정을 딛고 인터넷 쇼핑몰을 론칭한 사람에게 옷 쇼핑은 나쁜 짓이라고 하면, 그야말로 '넌씨눈' 아닌가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기후 위기에 대해 인지하고 탄소 발자국 줄이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건 필요하지만, 사람들의 의지에만 기대고 참여를 강요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재능 기부를 하는 건 다정하고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재능 기부를 하지 않는다고 욕을 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제도와 정책이 필요합니다!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 칭찬 스티커를 부여하든, 탄소 배출량을 줄이지 못하는 사업체에 벌금을 부여하든, 제도화된 틀 내에서 관리되어야 하죠. 그것도 일관적이고 합리적인 틀이 필요합니다. 평범한 우리들이 평범한 삶을 살면서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칭찬 스티커와 별점 덕이니까요. (스스로의 의지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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