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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Dec 14. 2023

담배 공장에서 금연 논의하기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고 합시다. 

전세 계약이든, 고용 계약이든, 하다못해 연애 계약이든(응?) 계약서는 함부로 작성하면 안 되죠. 꼭 도장을 찍어야 하는 경우에는 샅샅이 내용을 훑어보고 해야 합니다. 법적인 효력이 생기면 나중에 빼도 박도 못하니까요.


그리고 그건 개인 간의 계약 뿐 아니라 법인 간의 계약, 나아가 국가 간의 계약, 즉 조약이나 합의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대표가 자기네 국가의 명예를 걸고 꽝 하고 도장을 찍는 것이니, 항상 조심 또 조심해서 체결해야죠. 국가 간 조약에도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무래도 여러 국가가 모일수록 모든 국가의 일일이 이익을 반영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조약이 도출되기도, 구체적인 내용을 담기도 어려워집니다. 내용이 구체적일수록 지키는 것이 어렵잖아요.


예를 들어 룸메이트 간 동거 계약을 할 때, "A와 B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청소기와 물걸레로 거실과 방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A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재활용품을 분리 배출해야 하고, B는 매일 설거지를 한다."는 말을 계약서에 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보다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각자 최선을 다한다"는 뭉뚱그리는 말로 도장을 찍는 편이 훨씬 편할 것 같지 않나요? 집안이 돼지우리가 될 때까지 청소를 하지 않고도 "나는 이게 최선이라고!"하며 뻔뻔하게 굴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 보니 많은 경우 국가들이 함께 모여 선언하는 합의문이나 선언문은 "우리 열심히 노력할게요"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장식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특히 환경 부문이 그러한데요, 모두가 만족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도출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려울 뿐더러 경제나 안보만큼 긴급한 사안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두바이 기후 협상 

그렇지만 요즘 점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얘기가 약간 다릅니다.


미루고 또 미루다 보니 이 지경까지 왔고, 국가들은 이제 좀 진짜로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특히 기후 위기는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의 국가들이 모두 손잡고 노력해야 하는 문제다 보니, 유엔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어요. 올해도 각국의 대표자들과 산업계 관련자 등이 함께 모여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 유엔 기후협상이 어디서 열렸는지 아세요? 


바로 두바이에서 열렸습니다. 


두바이라니, 중동 아닌가요? 중동 하면 산유국 아닌가요? (두바이 자체에는 유전이 별로 없다고는 합니다만 아무튼

담배 공장..

그래서 이번 기후변화협상은 처음부터 좀 시끌시끌했습니다. 다들 기후변화의 주범인 화석 연료 의존도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는데, 화석 연료 생산의 심장, 산유국에서 회의가 열렸으니까요. 이건 뭐 담배 공장에 모여 금연을 논의하는 흡연자들의 모임 아닌가요? 


그래도 일단 산유국들도 기후 위기의 실태를 무시하지 못하고 정면 돌파하려는 것 아니냐, 라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멀찍이서 구경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목소리를 내서 자기 밥그릇은 챙기는 게 낫지 않겠냐는 거죠. 아무튼 그래서 담배 공장에 모인 흡연자들은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모두의 공통적인 생각을 담은 하나의 문서, 합의문을 도출합니다. 그리고 이 합의문에 어떤 문구가 들어갈지 엄청난 실갱이가 있었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런 기후변화 협상도 결국은 계약이라서, '아' 다르고 '어' 다르거든요. 어떤 문구를 넣는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들은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 어떻게든 애쓰게 마련입니다. 


이번 합의문은 뭐 엄청나게 대단한 합의문이 나온 건 아니지만, 두바이에서 해서일까요? 한 가지 의미심장한 문구가 들어갔습니다. 그건 바로 "화석 연료(fossil fuel)"이라는 두 단어가 들어간 거예요. 원래는 화석 연료의 단계적 퇴출(phase out)"이란 문구를 넣네 마네 했지만, 결국 그 말까지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화석 연료라는 언급을 한 것이 엄청난 일이라고 해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 뉴욕타임스 기사를 번역하여 첨부할께요~!


원문은 여기:
https://www.nytimes.com/2023/12/13/climate/two-words-that-could-change-the-world.html 
(내 맘대로 의역 많음 주의)



세계를 바꿀 수도 있을 두 단어

그저 짧은 두 단어에 불과하다. 11,000개의 단어가 들어간 문서 중 단 한 페이지에 나타난 이 두 단어. 


그러나 기후변화협상 COP28 최종 합의문에 "화석 연료"라는 이 두 단어가 들어간 것만 해도, 기후변화 대응에 있어 하나의 분수령이 될 수도 있다고 보인다. 이 합의문에서는 "정당하고 공평한 방식으로 화석 연료로부터 에너지 시스템을 전환하는 것"을 촉구하고 있다.


30년 넘게 전 세계 국가 대표들은 너무도 뻔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석탄, 석유, 가스 등의 화석 연료 연소를 감축시켜야만 지구 온난화가 재앙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뻔한 사실 말이다.


그러나 다른 곳도 아닌 두바이에서, 170개국 이상에서 온 대표자들은 이런 놀라운 합의를 단숨에 이루어 냈다. 


국가 지도자, 환경 운동가, 과학자들 다수가 바랐던 것처럼 구체적인 문구는 아니다. 또, 합의문이기 때문에 법적 구속력도 없을 뿐더러, 멋대로 해석하고 빠져나갈 구멍도 있다. 그렇지만 석탄, 석유, 가스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분명히 언급한 것만 해도 굉장한 성과라고 평가받고 있다. 


"유엔 기후 협상이 시작된 지 30년이 넘은 시점에 드디어 국가들은 기후 위기를 가져오는 화석 연료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하고 Manuel Pulgar-Vidal은 말했다. 그는 2014년 COP20 의장이었고 지금은 World Wildlife Foundation에서 일한다. "이 결과야말로 화석 연료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첫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화석 연료로부터의 전환에 관한 합의문은 세계 최대의 산유국 중 하나인 아랍에미레이트에서 나왔다. COP28의 의장인 Sultan Al Jaber는 UAE의 국영 석유회사 수장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해 관계가 충돌하는 것 아니냐는 날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의장이 이 아저씨.. 누가 봐도 아랍 아랍 (이미지:  vox.com)

하지만 2주 간의 협상이 끝난 뒤, 최종 합의문에 화석 연료에 관한 문구를 넣도록 압력을 가한 것은 최종적으로 Al Jaber였다.


"그렇게 욕을 먹던 그 사람이 이걸 해내네요,"라고 옥스포드 대학 기후 과학자 Myles Allen은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24시간 전만 해도 COP28에선 별 거 안 나올 거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최종 합의문 봐야 해요." 


현지에서는 잠도 못 자고 협상에 참여하던 많은 외교관들이 이 결과를 함께 축하했다. 


"하루 이틀 전만 해도 굉장히 화가 나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기는 이상할 만큼 낙관적인 분위기네요," 협상에 참여했던 당사자 중 한 명이 왓츠앱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쉬지 않고 2주간 미팅에 참여하느라 매우 피곤한 상태라고 했다. 


하지만 축제 분위기는 아마 잠깐일 것이다. 올해는 기록된 역사상 가장 더운 한 해였으며, 과학자들은 내년이 더 더우면 더웠지 이보다 덜 덥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화석 연료 때문에 더워진 온난화에다 엘니뇨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석유,, 가스, 석탄 생산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화석 연료 회사들은 앞으로 수십 년 생산을 늘릴 계획을 하고 있으며, 많은 국가들은 화석 연료를 수출하고 사용함으로써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이번 COP28이 진짜로 뭔가 바꾸기 위해서는, 희망에 찬 문구만 가지고 만족해서는 안된다. 정책 결정자들이 각국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재생 에너지를 늘이고 에너지 효율화를 개선하는 작업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개발도상국에 자본을 제대로 공급할 수 있도록 국제 자금 조달 시스템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식량 시스템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고, 자연 환경을 보존하는 본격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기술적인 진보도 매우 필요한 실정이다. 


하지만 어쨌든, 역사의 변화는 이 짧은 두 개의 단어로도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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