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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Dec 21. 2023

가격표가 다가 아니야

에어팟 쓰시는 분?


저는 에어팟 프로의 세계를 알게 된 뒤에 외이도염에 세 번이나 걸렸습니다. (사실 그건 내 잘못) 그만큼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어요.  사실 살 때만 해도 가격이 비싸서 많이 망설였는데, 요즘 들어 생각해 보니 사용 시간을 따져 보면 그리 비싸지도 않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전에, 특히 무선 이어폰 대신 유선 이어폰만 있을 때는 그냥 아무거나 썼었습니다. 지하철역에서 싸게 파는 것도 써 봤고요.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그런 길거리 제품들은 정말 빨리 고장이 나곤 했습니다. 하루 만에 한쪽이 안 나오게 된 적도 있어요. (ㅎㅎ) 그러면 하루에 만 원짜리 물건인 셈이잖아요? 에어팟보다 훨씬 더 비싸지요. 이처럼 제품 가격이란 것이, 단순히 구매할 때 가격표에 붙은 것만이 다가 아니란 생각을 요즘 하고 있답니다.

 


에너지의 '가격'?

혹시 요즘 이런 기사 본 적 있으세요?

구글 검색 이미지..

이어폰 같은 다른 재화처럼 에너지에도 '가격'이 있는데요, 이건 "에너지 가격" 특히 "에너지원별로 전기를 만드는 비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즘 기후 위기가 점점 심각해지다 보니 각국 정부와 기업에서는 재생 에너지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커지며 재생 에너지 가격도 많이 낮아졌어요. 특히 태양광과 풍력의 경우 가격이 꾸준히 하락해서, "국제적으로는" 이미 화석 연료를 이용한 발전 단가보다 낮아진 상태입니다.


오잉? 정말요? 재생 에너지 가격이 화석 연료보다 싸다고요?

진짜임. 내 뇌피셜 아님. (그래프 출처: OurWorldinData.org)

위 그래프를 보면, 지난 10년여 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이 한눈에 보입니다. 시커먼 석탄은 거의 제자리였던 반면, 해상 풍력과 육상 풍력, 그리고 무엇보다 태양광의 가격이 뚝 떨어졌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면 대체 왜 우리는 아직도 석탄이며 가스를 쓰고 있는 거죠? 최근 중국이랑 인도는 석탄 사용을 늘이고 있다는데, 걔네들은 더 비싼 걸 쓰다니 바보인가요? (플렉스가 취미) 그건 에너지 전환이 그렇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멀쩡히 굴러가고 있는 화력 발전소를 폐쇄하고 느닷없이 재생 에너지를 쓸 수는 없단 얘기죠. 특히 햇빛이 빛날 때만, 바람이 불 때만 발전이 가능한 재생 에너지는 화석 연료에 비해 간헐적이고 사용이 어려운 에너지원이기 때문에 이어폰 바꾸어 끼듯 간단하게 대체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가격표의 함정도 있습니다.


'재생 에너지원이 화석 연료보다 발전 단가가 싸졌다'는 말은 마치 물건을 살 때처럼 당장 가격표에서 차이가 나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거든요. 딱 생각해 봐도, 전혀 다른 성격의 에너지원의 가격을 비교하는 게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닌 것 같죠. 하다 못해 아주 비슷한 재화인 '길거리표 유선 이어폰'과 '사과 회사의 무선 이어폰'을 비교하는 것도 단순 가격표를 넘어선 사용 기간, 퀄리티, A/S 가능성 등을 따지는데, 에너지원은 훨씬 더 복잡할 거 아녜요?  


그래서 에너지원별로 전기를 만드는 비용을 비교할 때는 공평하게! 전 생애주기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태양광 패널이건, 석탄 화력발전소건 천년만년 영원히 쓰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수명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러니까 걔네들이 '평생' 만들어낸 전력량에 대비해서 걔네들한테 '평생' 들인 돈이 얼마냐를 계산하는 거예요. 이걸 엘씨오이, 한국말로는 '균등화 발전비용'이라고 하는데, Levelized Cost of Electricity의 준말입니다. 엘씨오이에 대한 내용은 제가 예전에 이미 썼어요: 엘씨오이는 무슨 오이인가요


아무튼 그래서 '재생 에너지의 가격이 싸졌다'는 말은 '엘씨오이가 낮아졌다'는 말이라는 사실! 당장 화석 연료 사용을 스톱하고 재생 에너지로 갈아탈 수 있는 단순한 가격표의 뜻은 아니라는 사실!



게다가 가격이 다는 아니잖아

엘씨오이는 이처럼 생애주기를 고려해서 계산한 가격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수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엘씨오이에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마트에서 딸기를 왕창 세일해서 한 팩에 5천 원이라고 크게 써 붙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주 조그만 글씨로 "20팩 이상 구매 시 5천 원, 아니면 2만 원"이라고 쓰여 있거나, "새벽 3시에 구매 시 5천 원, 그 외의 시간 2만 원"이라고 쓰여 있으면 완전 뒤통수 맞는 기분이겠지요?


가격표가 말해주지 않는 여러 한계를 반영해야 진짜 정확한 숫자라는 겁니다. 에너지 가격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면 태양광이나 풍력은 간헐적이기 때문에 내가 정말 원하는 시간에 맞추어 생산하기가 어려운데요, 그래서 에너지 시스템 입장에서 봤을 땐 '가치'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걸 반영하여 국제 에너지 기구(IEA)는 Value-adjusted LCOE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러면 태양광과 풍력이 그냥 엘씨오이만큼 유리하지는 않겠지요.

중요한 건 ‘가치’ (이미지: Unsplash.com)

물론 이 수치에도 단순히 ‘경제적‘ 가치를 넘어선 가치는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즘 들어 가장 중요해진 탄소 배출량이라든지, 생물 다양성에 끼치는 영향, 인간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등까지 고려하면 아마 그래프는 또 달라지겠지요?



한국은 또 다른 이야기

제가 저기 위에 "국제적으로는" 재생 에너지가 화석 연료보다 싸졌다고 따옴표를 붙였는데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이야기가 한국에선 약간 다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올해 들어 한국의 재생 에너지 가격은 상승하고 있어서 문제거든요. 대체 한국만 왜 그러는 걸까요?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재생 에너지 가격이 유달리 느리게 떨어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당장은 비싼 형편이에요. 몇 달 전 한국을 방문했던 앨 고어 미국 전 부통령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현재 화석 연료보다 재생 에너지가 싼데도 한국은 거의 마지막으로 그 대열에 합류하는 나라라고 지적했어요. 실제로 현재 96%의 나라는 신재생 에너지가 화석 연료보다 싸지만, 한국은 4% 중 하나입니다. 태양광이나 해상 풍력 단가는 미국의 두 배가 넘는다고 하니, 정말 비싸지요 [1]. 

유튜브 <제로에너지바> 캡처 (이 유튜브 진짜 재밌음)

그 이유는 재생 에너지 시장이 아직 작을뿐더러, 인허가 프로세스 같은 행정적 장벽, 부지 선정의 어려움과 상대적으로 높은 설비 비용 등이 있습니다. 에너지 전환이 우리나라에서는 유달리 느린 것이지요. 문제는 앞으로도 규제 환경이 그다지 나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원전의 상대적 발전 비용은 한국이 싼 편이라, 전환 속도가 느린 신재생 에너지 확대를 기다리느니 그냥 우리가 잘하는 원전을 밀고 나가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수학을 유달리 못하는 아이에게 수학 점수를 올리라고 다그치느니, 달리 잘하는 국어나 영어 같은 과목을 더더욱 기똥차게 잘하도록 밀어 주자는 것이죠


아무튼, 전 세계적으로 재생 에너지의 발전 가격이 내리는 것은 다행입니다. 가격표가 다는 아니라지만, 우리가 구매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는 틀림없잖아요? 원전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재생 에너지가 지금보다 확대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한국에서도 가격표가 좀 후루룩 내려가길 바라봅니다. 

 


[1]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3101611280003604?rPrev=A2023101816420003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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