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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Oct 16. 2020

여섯 살 아이의 눈에 비친 사회 불안정이란

내가 여섯 살일 때를 생각해 본다. 


하루는 무척 길었고, 세상은 늘 똑같이 따스했다. 언니 손을 잡고 병설유치원과 학교를 다녔고, 엄마 없이 혼자서 집 앞 슈퍼에 다녀오기도 했다. 경찰서를 지나면 든든한 경찰 아저씨들이 보였고,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됐다. 주사는 싫지만 금방 나을 수 있었으니까. 


강산이 몇 번 바뀌고 나도 엄마가 됐다. 나의 어린 아들은 이제 만 여섯 살이다. 그리고 내 아이는 나도, 나의 엄마도 겪지 못했던 세상을 우리와 함께 경험하고 있다. 작년에 홍콩에서 시위가 격화되었을 때는 이 곳의 특수성 때문에, 그리고 올해 초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부터는 그냥 지구촌에 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겪어 내고 있다. 


여섯 살 내 아이가 보는 지금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여섯 살의 내가 살았던 그 세상과 조금은 닮아 있을까. 



시위가 한창 최고조였던 지난 10-11월, 아이의 하루 일과는 의자를 끌어다 놓고 창문 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파트 고층 우리 집에서는 지하철 역 사거리가 한눈에 보이고, 지난밤 시위의 흔적이 아침에도 역력했다. “엄마, 어젯밤 프로테스터가 왔었어?” “경찰 아저씨들 왔었어? 찻길 막혔어?”라며 질문을 쏟아내곤 했다.


실제로 그 사거리에서 비무장 시위대 한 명이 경찰의 실탄에 맞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매일 밤 그곳은 시위대가 집결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어 버렸다. 아이를 재우고 창 밖을 가만히 내다보면, 검은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가 경찰 버스와 소방차가 열 대씩 오고서야 흩어지는 밤이 반복됐다. 경찰 측이 꺼내 든 깃발 색만 보고도 곧 최루탄을 쏘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고, 뉴스를 틀면 아이와 거닐었던 시내의 고가 도로가 불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안정적인 사회가 주는 정서적 안정감을 얼마나 당연히 여겼었던지 깨달았다.


아이에게는 최대한 자극적인 뉴스를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이도 시위 풍경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주말에 몇 번 시내에 나가서 외식을 했다가 구름처럼 운집한 검은 옷의 시위대와 그들과 대치한 경찰들이 차도를 모두 막는 바람에 버스도 택시도 모두 끊겨 간신히 지하철을 타고 온 적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친중계 은행이나 상점 유리창이 부서지고, 심지어 집 앞 스타벅스의 로고 판까지 뜯어진 것을 걸어 다니며 그대로 목격한 아이였다.  


아이가 가진 여러 궁금증 중 가장 대답하기 곤란했던 것은, “누가 나쁜 쪽이야?”라는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분법적인 사고로 “우리를 도와주는 친절한 경찰 아저씨”와 “까만 옷을 입고 마스크를 쓴 무서운 프로테스터”니까 시위대가 나쁜 쪽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와서는 “내 친구가 경찰이 나쁘대. 경찰이 프로테스터를 때렸대. 때리는 건 나쁜 거잖아.”라면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여섯 살 꼬마에게 집회의 자유 개념을 설명해 주려고 시민들은 정부에게 화가 나면 모여서 항의를 하기도 하고, 평화적인 시위는 나쁜 짓이 아니고 시민의 권리라고 얘기해 줬지만 (일단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고) 사회적 갈등은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누가 나쁜 쪽일까? 아니, 엄마 아빠가 속으로 뭐라고 생각하든, 아이에게는 뭐라고 설명해 줘야 바람직할까?


아이 학교에서 보내준 대처법 자료를 보니,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양쪽의 입장을 간단히 설명해 주는 것도 좋다고 한다. 일단 세계 많은 국가들에서 시위대 측을 응원했듯, 공감할 수 있는 점이 물론 있었다. 나의 조국이 물건처럼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한 것만도 혼란스러운데, 이제까지 누린 특수한 지위와 자유를 뺏긴다면 그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의가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경제와 인프라를 파탄내며 사회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하는 정치 철학적 의문도 들었다. 특히 시위가 장기화되며 단순 불편함을 넘어서 불안감이 고조되자,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는 시위의 지속 자체가 주는 피로감이 엄청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올해 초, 생각지도 못한 바이러스가 중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사스 경험이 있는 홍콩은 그 즉시 모든 것을 걸어 잠그었고, 길거리는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시위고 뭐고, 일단은 전염병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우리 가족은 중국 본토와 교류가 많은 홍콩에 계속 머물러야 할지, 아니면 상황이 그나마 나을 때 한국에 가서 칩거해야 할지 계속 고민을 했다. (하필 설날 연휴 전에 인터넷 회사와 싸워서 집에 와이파이조차 안됐다.) 어차피 아이 학교도 남편 직장도 닫았고, 이 곳에 있는 몇 안 되는 친한 친구들도 모두 본국으로 돌아간 시점이었다. 하지만 고민이 무색하게 이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전 세계 수많은 국가들에서 폭발적으로 확진자 수가 증가하면서, 하늘길은 금방 막혔다.


5월 말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스와는 달리, 코로나는 날이 더워져도 사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전 세계에 퍼져나가는 무시무시한 속도를 지켜보며, 어쩔 수 없이 집에 처박혀 있었다. 아이는 다행히 답답하다는 말 없이 집에서 잘 지냈지만, 엄마 아빠가 예민한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콧바람을 쐬러 아주 잠깐 아파트 1층에라도 내려갔다 오면 부산을 떨며 온 몸을 씻기고, 엘리베이터에서 손잡이라도 만지면 버럭 화를 내는 엄마를 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에게 무조건 겁을 주기는 싫었지만, 습관적으로 입과 코에 손이 가는 아직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예방약도 치료약도 없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걸리면 감기랑은 비교도 안되게 아프다는 말도 했다. 병원이라면 질색을 하는 아이지만, 병원에 가도 낫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내가 생각해도 무척 낯설고 무서운 것이었다.


이 여섯 살 꼬마는 바이러스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이제는 과도할 만큼 걱정을 한다. "엄마, 바이러스 약은 언제 나와?" "잘 때 모르고 입을 쪼금 벌렸다가 그 사이로 바이러스가 들어가면 어떡해?" "바이러스에 걸리면 나 케이지(cage)에 들어가야 해?" (음압 치료실 얘기를 해준 적이 있는데 케이지로 전락) 사물을 만지며 세상을 배워가야 할 아이에게 엄마는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친구들과 뛰어놀며 세상을 즐겨야 할 아이에게 선생님은 서로 멀리멀리 떨어지라고 반복한다. 이 얼마나 차갑고 슬픈 세상인가. 


나의 여섯 살 때와는 분명 다르다. 변함없이 든든해야 하는 세상은 흔들리고 아슬아슬한 것만 같고, 이런 시대를 겪게 해서 미안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불안정한 것은 사회와 시대이지, 아이의 자아가 아니다. 아이는 어떤 세상에서든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잘 성장해 나갈 것이고, 어찌보면 뉴 노멀을 조금 더 일찍 겪고 배워서 나보다 훨씬 더 잘 헤쳐 나갈 것이다. 


아이가 보는 세상은 내 생각보다는 훨씬 정상적이고 따뜻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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