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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an 07. 2021

코로나 시대의 외동 육아

물론 나도 안다. '평균'이란 것이 의미가 없단 것을. 오죽하면 <평균의 종말>이란 책까지 있는데, 평균이란 개념 자체가 대단히 무의미하며 그럼에도 우리가 과도하게 의존하곤 한다는 내용을 한 권 내내 조목조목 말해 준다. 아무튼 그래도 나는 항상 궁금하다.

코로나 시대에 외동아이들은 평균적으로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날까?


지난 1년, 아이가 학교를 갈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 두 달 남짓이었다. (근데 왜 학비는 1년 치를 냈는가) 나머지 시간에 아이는 나와 함께 집에 있었다. 나는 낮 시간의 많은 시간을 아이의 놀이 친구이자 선생님이 되어, 레고를 조립하고 영어와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칩거가 길어지자 나의 역할은 피아노 선생님과 중국어 선생님, 체육 선생님으로까지 넓어져야 했다. 나와의 시간이 아이의 하루 중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아이가 만난 친구는 손에 꼽는다. 그나마도 지역 감염이 0명으로 유지될 때에는 부담이 적었지만, 상황이 안 좋아지면 대부분 집에 있거나 가끔 산책을 하는 정도였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반 친구가 마침 외동이라서 그 친구를 가끔 만나서 놀았는데, 주로 마스크를 쓰고 밖에서 잠깐씩 놀았다. 다른 집 한국 남매도 번갈아 가며 1-2 주에 한 번씩 집에서 놀았는데, 가족 외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단 걸 서로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감염 상황이 많이 나아진 작년 중순에는 잠시나마 학교를 가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금세 제3의, 4의 유행이 왔고 학교 문은 굳게 닫혔다. 긴긴 하루를 또 둘이서 보내던 내 머릿속에는 항상 이런 궁금증이 떠나지 않았다. 다른 외동 집들도 이렇게 단출하게 지낼까? 이것이 '평균'일까? 아니, 이것이 '정상'일까?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요즘 한국에는 외동이 더 많다고 한다. (최근 출산율을 보면 놀라울 일도 아니긴 하다.) 나의 경우 7년간 해외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며, 외동보다는 아이가 둘인 집을 더 많이 보았다. 아무래도 외로운 해외 생활에 식구가 여럿인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아이가 둘 이상이면 남들은 평균적으로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고민을 할 여유조차 없이 하루가 지나가리라 생각한다. (엄마-아이1), (엄마-아이2), (엄마-아이1&아이2)의 관계, 이에 더해 아이들이 서로 싸우기라도 하면 정신없이 시간이 채워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하나고, 자기 앞가림을 하는 나이가 되어가다 보니 외동을 키우는 일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사회적 상호작용이 지금처럼 금기시되는 특수한 시대에서 형제자매가 없는 아이를 키워내는 것에 대해. 남을 향한 배려심과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이런 상황에서도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함께.


물론 내 친구들 중에도 배려심 넘치게 잘 자란 외동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연고 없는 타지에서 몇 번이나 이사를 다니고, 심지어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집에만 갇혀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는 없기에 괜한 걱정이 되는 것 같다. 또, 나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유독 언니와의 재미난 추억으로 빼곡히 차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고. 나의 아이는 항상 동생에 별 관심이 없고, 갖고 싶냐고 물어봐도 일관적으로 "아니"라는 대답만 돌아오는데 나만 혼자 생각이 복잡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주변에서 외동을 키우는 부모를 보면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만 계획했고 세 식구만으로도 완벽하게 행복해하는 집도 있고, 둘째를 계획했지만 여러 사정상 갖지 못하거나 아직 노력 중인 집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다가 둘째가 생겨서 기쁘게 낳는 집도 있고. 가족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코로나 시대의 생활 패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가 몇이든 외부인은 단 한 명도 만나지 않는 집도 많이 있고, 나처럼 확진자 수가 적을 때에는 친한 한두 집 정도 만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나름의 기준을 정해 평소보다 조심하는 선에서 사회 생활을 이어 나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결국은 <평균의 종말>에 나온 그대로, '평균'이란 건 없나 보다. 그저 '개인'이 있고, '맥락'이 있을 뿐. 다만 딱히 의미가 없다 해도, 외동 아이의 평균적인 사회생활에 대한 내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지난 주에 아이의 친구 둘과 마스크를 쓰고 등산에 나섰다. 아이들은 경사를 오르면서도 힘든 내색 하지 않고 당연한 듯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한적한 곳에서 잠시 쉬려고 하니 아이들은 "Mom, we're more than two now. (엄마, 지금 우리 두 명 이상인데? - 홍콩에서는 현재 공공장소 2명 이상 모임 금지를 두 달째 시행 중이다)"라며 벤치에 함께 앉기를 주저했다. 우리 아이는 'not safe'하다며 결국 5m쯤 멀찍이 가서 마스크를 내리고 물을 마시더니 다시 마스크를 쓰고 합류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마스크를 다시 고쳐 쓰는 모습을 보며, 기특함과 미안함에 내 얼굴이 벌개지는 게 느껴졌다. 모든 아이들은 답답한 시간을 불평 없이 견디고 있구나. 당연한 것처럼 지키고 있구나. 외동이라서 힘든 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너무 짧았다. 둘이면 둘인대로, 셋이면 셋인대로, 이 시대는 모든 어린이가 각자의 사정을 딛고 버티게 만들고 있다.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어린이들은 (...) '사회적 거리 두기'에 가장 헌신적으로 협조한 집단이다. (...) 어린이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어른들도 알아야 한다. 

정말,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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