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친정 아빠가 보내 주신 여러 책들 중에 <인생의 재발견: 마흔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원제: Life Reimagined, 저자: 바버라 해거티)>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아, 아빠..?! 나 아직 마흔 되려면 좀 남았는데.. ㅠㅠ”라는 억울한 마음(?)을 뒤로하고(만으로 하면 아직 30대 중반이라 우길 수 있는(?) 나이라고요) 찬찬히 읽어 보았는데요, 예상보다 제게 딱 필요한 말이 많더군요. 마냥 젊은 시절을 벗어나 아이를 키우고, 생활에 치이고, 일도 하고.. 참 치열하고 생산적으로 사는 듯하지만 ‘행복’보다는 ‘의미’를 추구하게 되는 인생의 어떤 전환점이 누구에게나 다가오기 마련이니까요. 역시 저의 독서 멘토가 아무 책이나 보내 주시진 않는 듯합니다 :)
인생과 마찬가지로 기업이나 사회도 마찬가지로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전환점을 맞습니다. 저희 아이는 가끔 저한테 “엄마, 엄마가 어렸을 때는 자동차 대신 마차 탔어?”라고 묻는데요(예끼 이 녀석), 사실 아이가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마차만큼이나 낯선 풍경을 맞닥뜨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와 만나려면 집으로 전화해서 “안녕하세요, OO 있나요?”하고 부모님께 여쭤 보았어야 했고, 아이패드 같은 디지털 기기 없이 긴긴 하루를 보냈죠.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은 5년 전, 10년 전과 비교해도 너무나 많이 변했지요.
그에 따라 통상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가치도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대기 오염이나 수질 오염에 대한 경각심은 공산당을 물리치자는 모토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 같아요. 간혹 포스터 그리기 대회에 나갈 때 생각해 보는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구촌의 인구가 점점 늘고 이를 떠받칠 경제가 모두 화석 연료로 굴러가면서, 지구 온난화 문제가 가장 긴급한 환경 문제 중 하나로 떠올랐죠. 기후변화의 징조가 지구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하며, 정부나 기업들도 이에 대한 대책을 고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사기업의 경우 예전에는 ‘사회적 책임’의 일환으로 접근하던 문제가 이제는 실제적인 경제적 이득과 직결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ESG를 중시하는 기업들이 많아지며 자금이 관련 펀드에 모여들고, 정부 규제가 예전보다 엄격해지면서 온실 가스를 줄이지 않으면 정말로 손해를 볼 입장에 처해 버리게 되었거든요. 소비자들도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며 기업 이미지 하락도 무시 못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요. 개인이 중년 즈음 인생 2막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기후변화를 마주한 기업들도 어떻게 하면 새 시대에 잘 적응하고 번영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기후변화의 주범이라고 비난을 받는 석유, 가스 기업들입니다. 예전에는 엄청난 이윤을 거두어들이며 승승장구했던 그들인데 말이죠. 다른 기업들이야 공정 방식을 바꾸거나 친환경적인 경영을 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변화를 꾀할 수 있지만, 이들은 지금 존재 자체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당연히 아직은 탄소 기반 경제니까 그 거대한 몸뚱이들이 잘 굴러가고 있지만, 시장은 늘 미래를 내다보기 때문에 기업의 가치는 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석유나 가스 회사들은 몇 년 전부터 어떻게든 살 길을 모색하려 발버둥을 치고 있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Total이나 BP는 기업 리브랜딩에 힘쓰고 있습니다. 프랑스 토털 사의 경우 기업 이름을 Total에서 TotalEnergies로 바꿀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석유 화학 기업' 느낌에서 신재생 에너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에너지 기업 느낌을 주려는 의도겠지요. 뿐만 아니라 올해 미국 석유 협회(API)에서 탈퇴했고, 2050년까지 넷 제로 배출량 목표를 선언했습니다. 신재생 투자를 늘리는 일환으로 태양광 사업에도 뛰어들겠다고 공언했고요. BP는 이미 한참 전에 "British Petroleum"에서 "Beyond Petroleum"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녹색 성과는 내지 못해 욕을 좀 먹고 있었지요. 최근에는 넷 제로 2050 선언을 비롯하여 녹색 기업 이미지를 광고하는 등 갖은 애를 쓰고 있어요. (그린워싱이라 비판받기는 합니다.)
Total의 리브랜딩 (이미지: Transform Magazine)
이뿐 아니라 다른 거대 석유 회사들도 기존 이미지 탈피를 위해 앞다투어 넷 제로 목표를 선언하는 추세죠. 그렇지만 이제 선언만 한다고 다가 아닙니다. 2035년까지 탄소 집약도(carbon intensity)를 45% 감축하겠다고 발표한 Shell의 경우 최근 네덜란드 법원에서 “집약도로는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을 장담할 수 없다. 절대적인 배출량 수치를 줄여야 한다”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으니까요.
사업 영역이 천연가스에만 국한된 회사는 이런 석유 회사들과는 입장이 약간 다른데요, 왜냐하면 천연가스는 석유나 석탄 등 기타 화석 연료에 비해 ‘그나마 청정하다(?)’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스 회사의 로비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만, 온실가스 배출량이 다른 연료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미국의 경우 셰일 가스의 발견과 더불어 워낙 부존량이 풍부하여, 천연가스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Southern California Gas Company(이하 SoCal Gas)는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천연가스 회사인데요, 요즘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 중입니다. 요즘 그래서 ‘재생 천연가스(renewable natural gas)’라는 다소 이상한 말을 들고 나와서 홍보를 하고 있어요. 아니, 재생 천연가스라니, ‘건강한 담배’나 ‘녹색 해충약’ 같은 뿡뿡이 소리 아닌가요? 아무튼 그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목축업이나 음식물 쓰레기, 하수 처리장에서 나오는 고약한 냄새의 메탄을 이용하겠다는 건데요, 이런 걸 ‘바이오메탄’이라고 부르거든요. 이 바이오메탄으로 현재 가스 수요를 대체하겠단 겁니다. 말 자체는 꽤 괜찮아 보입니다만, 사실 이런 시설의 경우 대기 및 수질 오염의 문제가 따라올뿐더러, 전체 가스 수요량의 극히 일부만 담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린워싱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일부의 사실을 과장되게 포장하고 실체를 감추고 있으니까요.
SoCal Gas는 기후변화 대처에 필수적이라고 여겨지는 전력화(electrification) 역시 캘리포니아 주가 설정한 기후 목표에 적합하지 않다는 둥, 가스를 수호하기 위해 여러 모로 애쓰고 있습니다. 사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스 회사들이 가스를 이용한 난방 시스템을 유지시키기 위해 로비를 하고 있는데요, 모두 전기를 사용하게 되어 버리면 가스 수요가 줄고 본인들이 손해를 보기 때문이죠.
어제 아이랑 도서관에 갔었는데요, 토마스 기차 책 중 이런 이야기가 있더군요. 아시다시피 토마스 기차의 주인공들은 대개 증기 기관차잖아요? 그런데 Sodor 섬 일부 지역에서는 이제 증기 기관차 대신 디젤 기차만 쓰기로 결정해서 기존의 증기 기관차는 폐기를 당하게 되어 버립니다. 도태되는 기술은 서럽게 마련이라는 것이 어린이 책을 읽으면서도 와닿았어요.
토마스 시리즈 중 <Oliver>의 한 페이지
이와 똑같이 거대한 회사들이 도태되면 거기서 야기되는 손해가 어마어마합니다. 그 회사들이 먹여 살리는 직원들과 그 가족들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래서 더더욱 발 빠르게 변화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화석 연료가 몽땅 좌초 자산이 되어 버리기 전에, 새로운 투자를 지양하고 탈탄소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야만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이미지세탁, 그린워싱이나하며실질적인변화를미루는것이예전에기후변화를부정하며고집을부리던것과뭐가다를까요? 기사를 읽다가 이런 말이 나와서 참 공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