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워싱(greenwashing)에 속지 마세요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은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 뮤지컬 <빨래> 중 -
결혼 9년 차에 여전히 집안일은 젬병이지만, 그래도 개중에 좋아하는 걸 꼽자면 건조기에서 막 나온 보송보송한 빨래를 개는 겁니다. 세탁기에 들어갈 때만 해도 꼬질꼬질 더러웠던 아이의 양말이며 땀에 젖은 티셔츠도 새로 태어난 것처럼 깨끗하지요.
하지만 세탁에는 꼭 그런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미드 <Ozark>에 나오는 것처럼 범죄에서 비롯된 더러운 돈을 합법적인 것처럼 바꾸는 돈세탁도 있고요, 예전에 구설수가 있었던 연예인이 <무릎팍 도사>나 <힐링 캠프>에 나와서 이미지 세탁을 꾀하기도 합니다(옛날 사람이라 이런 프로밖에 모름..). 출신 대학을 교묘히 속이거나 편입, 대학원 진학 등을 통해 학벌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도 학벌 세탁이라고 부르더군요.
최근 일반 소비자들의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며 또 다른 형태의 세탁이 대두되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친환경 제품인양, 친환경 활동 인양 포장하는 것을 '위장 환경주의,' 또는 '그린워싱(greenwashing)'이라고 부르는데요, 이제는 미디어에서도 제법 자주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그린워싱, 어떤 건데?
인터넷에 찾아보면 그린워싱에 대해 쉽게 잘 설명되어 있는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구독하는 브런치 작가님의 글도 있고요:
https://brunch.co.kr/@ireneadler72/46
그린워싱은 쉽게 말해 '친환경적인 척'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용하는 세제에 "무독성" "자연주의"라는 말이 쓰여 있다고 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으로 그런 문구를 삽입했는지 애매모호합니다. 아니면 (가끔은 의도적으로) 소비자들이 오해하게끔 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예를 들어 이니스프리에서 화장품 병에 "Hello. I'm Paper Bottle"이라는 라벨이 달린 종이를 붙여 판매한 경우가 있었어요. 소비자들은 이걸 보고 플라스틱 병이 아닌 종이로 만든 병인 줄 오해하기 꼭 좋겠죠. 하지만 사실은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었던 라벨을 종이로 바꾼 것뿐, 병 자체는 플라스틱이어서 그린워싱의 사례로 자주 거론되곤 합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 아니냐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워싱이 먹히는 이유는 이제 소비자들이 많이 똑똑해져서 '착한 소비'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제품을 소비하고, 착한 기업의 물건을 구매하고자 하는 거죠.
하지만 그린워싱은 '그린 버블'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린워싱을 행하는 기업의 가치가 실제보다 높게 평가되어 거품이 낄 수 있다는 거죠. 실제로 덴마크의 해상풍력 개발사 오스테드의 경우 실적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가가 뛰고 있다고 합니다 [1]. 요즘 글로벌 기업들은 앞다투어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내세우고 있는데, ESG 관련 펀드에 돈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죠. 그럴듯해 보이는 트렌드이다 보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실체가 없는 곳에 돈을 투자할 수도 있는 겁니다.
관련 기사를 읽다 보면, 그린워싱의 폐해를 줄이려면 소비자 입장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들 권고합니다. 친환경 로고를 흉내 낸 가짜 로고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실제로 환경에 무해한 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단 거죠. 하지만 점점 더 교묘해지는 그린워싱을 구별하는 책임이 소비자에게만 전가되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 아닐까요?
안 그래도 그래서 영국이나 호주, 미국에서는 '그린 마케팅 가이드라인' 또는 '그린 가이드' 등의 이름으로 모호하거나 과장된, 또는 허위의 위장 행위를 규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친환경적인 이미지만으로 기업이 이득을 취하지 않도록 막는 거죠. 한국에서도 원래 2013년 그린워싱을 방지하기 위한 가이드라인 논의가 나왔었는데, 성과가 있었는지 찾아보니 별다른 자료가 나오지 않더군요. 하지만 올해 4월 기사를 보니 환경부에서 ESG 평가 가이드라인을 구축한다고 밝혔으니, 지켜봐야겠습니다.
기후변화의 그린워싱
친환경 제품에만 그린워싱이 있는 건 아닙니다.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에너지 활동에 대해서도 그린워싱은 점점 더 큰 문제가 되어가고 있어요.
예를 들어 요즘 '넷 제로'와 '탈탄소'가 화두지요. 기업들은 '탄소 저감을 위해 노력하는 척'하기도 한다는 소립니다. 예를 들어 정유사나 시멘트/철강 회사들은 친환경 이미지를 얻기 가장 어려운 기업들이지요. 애플이나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소프트웨어 기반의 회사들은 친환경으로 치고 나가는 마당에, 이들은 기후변화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벗기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린워싱의 유혹에 빠지기 더 쉬워요.
BP(TMI: 'British Petroleum'에서 'Beyond Petroleum'으로 이름 바꿔서 이미지 상승 꾀함)를 비롯해 쉘, 토털, 엑손모빌 등은 모두 앞다투어 넷 제로 선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와, 대단하다!"라고 감탄하기 전에 잘 살펴봐야 합니다. 일단 넷 제로라는 것의 '범위(scope)'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의미는 천지차이로 달라질 수 있거든요. 예를 들어 생산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포함시키는지, 아니면 해당 기업이 직접 관리하는 사업장에서 배출하는 탄소만을 포함시키는지 보아야 하고요. 또, '배출량'의 절대적 양이 아니라 '집약도'를 목표로 삼기도 하는데, 집약도는 낮아지더라도 배출량 자체는 증가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는 어차피 적자 내는 활동을 접거나 원가 절감을 위해 디지털화하는 활동에 대해 "탈탄소를 위한 큰 결정을 했다"는 식으로 언론 플레이를 하기도 합니다. 모두 그린워싱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죠.
정부의 정책도 그린워싱으로 비난받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영국 정부는 이번 UN 기후변화 협상(COP26)을 그린워싱 대잔치로 만들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요 [3], 원래 이런 국제 협상에는 스폰서 기업들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Shell이나 BP 같은 정유사들은 당연히 이런 스폰서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번에 주 스폰서로 승인을 받은 Reckitt(Dettol, Vanish, Air Wick 등 우리에게 익숙한 브랜드를 생산하는 모기업)이 결코 기후변화에 긍정적인 기업이 아니란 거죠. 왜냐하면 자사 제품들을 만드는 데 엄청난 양의 팜유(palm oil)를 소비하는데, 팜유 생산은 기후변화에 결정적인 삼림 파괴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노동력 착취 등 인권 문제도 관련이 되어 있는 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는 "우와! 저 기업은 UN 기후변화 협상 스폰서를 했대. 정말 좋은 기업이네"라는 메시지밖에 남지 않는단 게 문제죠. 그래서 많은 환경 단체들이 쓴소리를 하는 겁니다.
사실 요즘 각국 정부가 앞다투어하는 넷 제로 선언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나라 정부도 기후변화 방지에 관심이 있나 봐."라는 아이디어를 국민들의 머리에 심어 주지만, 실체가 없는 넷 제로는 그저 위장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레타 툰베리가 최근 한 이 말을 되새겨 볼만 합니다.
문제는 넷 제로 목표 자체가 아니라, 넷 제로가 진짜 행동에 옮기는 걸 미루는 변명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The problem is of course not the net zero targets themselves, but that they're being used as excuses to postpone real action.")
- 그레타 툰베리
*표지 이미지 출처: https://www.chinawaterrisk.org/opinions/8-brands-called-out-for-greenwashing-in-2020/
참고 자료
[1] https://www.hankyung.com/opinion/article/2021022309081
[2] https://www.ajunews.com/view/20210408112247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