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괴로운가?
인간은 왜 괴로울까요?
삶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고, 우리는 그 앞에서 늘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어느 대학/직장을 갈지? 이 사람과 사귈지 말지? 결혼을 할지 말지? 어떻게 살아갈지? 이런 큰 선택도 요구 받지만, 상대방의 질문에 어떤 답을 할지, 지금 어떤 행동을 할지, 짜장면과 짬뽕 중 뭘 고를지 까지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인간이라면, 인생을 살면서 이러한 질문에 답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요구 입니다.
자, 지금부터 답을 요구하는 자와 답 해야만하는 자가 생겼습니다.
- 답을 요구하는 자: 세계
- 답을 해야만하는 자: 당신
요구받고 제공해야 하는 상황에는 긴장감, 즉 감정이 생깁니다. 늘 그렇죠. 저와 당신이 만났다고 가정해봅시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잠시의 침묵)
"OOO 입니다."
단순한 대화 같지만 대화 사이의 침묵에서 요구자와 제공자의 필연적인 긴장(감정)이 생깁니다.
그 감정(긴장)이라는 에너지가 당신의 행동(대답)을 일으킵니다.
진화론자 찰스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 관하여'에서 감정은 적응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현대 뇌과학에서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감정이 이성적 판단과 행동 결정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고 밝혔습니다.
감정은 행동을 일으킨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감정은 행동을 일으킵니다.
감정의 전적인 목적이 행동을 발생기키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감정이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확실합니다.
만일 어떤 생명체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의 목적은 유기체가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움직여 피할 수 없는 식물에게 (무언가에 의해 밟힐) 고통이나 공포 같은 감각을 부여하는 것은 아무런 목적도 없는 잔인하고 헛된 일이므로, 자연은 식물에게 그런 능력을 주지 않았습니다. 아리토텔레스로부터 전해진 오래된 이야깁니다.
쉽게 말해, 화재경보기가 울리는데, 대피할 문이 없는 건물과 같습니다. 이 경우 경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인간은 필히 행동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당연히 행동합니다(적극적, 소극적 행동 모두 포함 해서).
어쨌건 세상의 요구에 -> 인간은 감정이 발생하고 -> 행동이 촉발될 에너지가 고조됩니다.
순간 인간은 고민에 빠집니다. 세상의 요구에 크게는 두 가지 이상의 선택지가 있겠죠. 떠오른 선택지는 모두 나름의 그럴싸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것을 선택했을 때의 장단점이 있겠죠. 하지만 마냥 장점만 있을 수 없기에 쉽게 한 쪽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당신은 그림 그리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세상과 소통하는 기쁨을 느낍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가업을 물려받거나, 대기업에 취직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기서 세상은 당신에게 요구합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당신의 감정 에너지는 최고조에 이릅니다. 그리고 당신의 내면에서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론가 VS 야망가
인간의 내면, 두 목소리의 싸움
이 고민의 중심에는, 우리 마음속에 사는 두 가지의 목소리, 즉 '이론가(관념)'와 '야망가(욕구)'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 '이론가(관념)'의 주장: 이 목소리는 당신이 살아오면서 학습한 모든 사회적 규칙, 도덕, 합리적 판단을 대변합니다. "안정적인 길이 성공이다", "부모님께 순응하는 것이 도리다" 와 같은 수많은 관념을 바탕으로 가장 안전하고 실패 확률이 적은 이성적 규칙을 제시합니다.
- '야망가(욕구)'의 외침: 이 목소리는 당신의 가장 원초적인 생명력, 즉 욕구 그 자체입니다. 사회적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과 무관하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예술가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야망을 외치죠.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야망가의 목소리입니다.
자, 이제 당신은 이 두 목소리 사이에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낍니다.
현실주의자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말라며, 이성적인 이론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대로 이상주의자는 내면의 욕망을 쫒아 사는 것이 행복이라며 야망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진짜 괴로움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예술을 선택하든, 취업을 선택하든 그 선택 자체가 우리의 괴로움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 '더 좋은 선택인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합리를 따지는 것은 머리가 하는 일입니다.
그 대신 마음, 즉 정확히는 감정에게 답을 물어야 합니다. 감정은 선택이란 이성적 행위에서 철 없는 아이 같이 취급되지만 인간 대부분의 선택과 행복은 감정에 의해 결정됩니다. 뇌 과학적으로도,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Amygdala)의 힘은 이성을 담당하는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보다 더 빠르고 강력합니다.
괴로움의 탄생
선택이라는 이름의 억압, 그리고 비극
인간의 괴로움은, 둘 중 한쪽의 목소리를 힘으로 억누르고 침묵시킬 때 탄생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론가'의 손을 들어주고 안정적인 길을 선택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표면적으로는 갈등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내면에서는 '야망가'의 목소리가 폭력적으로 억압되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순수한 욕구, 예술가로서 살고 싶다는 간절한 감정 에너지는 갈 곳을 잃고 지하 감옥에 갇혀버립니다.
이 '이론가'의 강력한 관념들은 어디서 왔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겪었던 삶의 첫 순간, 아기와 엄마의 관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
아기와 엄마,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마음
갓 태어난 아기의 세상을 상상해 봅시다. 아기의 세상은 아직 분화되지 않은 감각의 세계입니다. 배가 고프다는 느낌, 기저귀가 축축하다는 느낌, 이 모든 것은 그저 '불편하다'는 하나의 거대한 욕구로 경험됩니다. 아기는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 즉 울음을 터뜨립니다.
이때 엄마가 다가옵니다. 엄마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 우리 아기 배가 고프구나"라고 해석하며 젖을 물립니다. 아기의 불편함은 사라지고, 따뜻함과 포만감이라는 편안함을 경험하게 되죠. 이 경험이 반복되면서, 아기의 단순한 생리적 욕구는 점차 진화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아기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젖만이 아닙니다. 그 젖을 주는 존재, 즉 엄마의 따뜻함, 엄마의 존재 그 자체가 필요해집니다. 생존의 욕구가 애정의 욕구로 확장되는 순간입니다.
이제 아기는 젖을 원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늘 곁에 존재하고 반응해주는 것, 바로 애정을 원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아기의 내면에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하고 무한한 욕구(엄마와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 모든 불편함이 사라지는 완전한 평온)는, 울음이라는 아주 단순하고 제한된 요구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그 요구를 해석하고 젖을 주고, 안아주고, 기저귀를 갈아주지만, 아기의 그 무한한 욕구를 100% 완벽하게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엄마와 아기는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의 무한한 욕구와, 언어(울음 포함)를 통해 표현되고 타인에 의해 해석될 수밖에 없는 나의 요구 사이에는, 결코 완전히 메울 수 없는 틈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평생 짊어지고 가는 '근원적 결핍감'의 정체입니다.
이 결핍감은 엄마가 사랑을 주지 않아서 생긴 상처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소통이라는 행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입니다. 우리는 이 근원적인 불안감과 공백을 어떻게든 채우기 위해, 부모와 사회가 '정답'이라며 건네주는 생각의 퍼즐 조각들을 비판 없이 삼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내사'이며, 훗날 '이론가'의 목소리가 되어 우리 삶의 규칙 행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추상적인 과정을 실제 어린 아이의 내적 경험을 통해 들여다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나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엄마가 나를 보고 웃어줄 때 내 마음은 햇살처럼 따뜻해지지만,
가끔은 엄마가 나를 떠날 것만 같은 무서운 불안감이 찾아와요.
오늘 나는 아주 멋진 공룡 그림을 그리고 너무 신나서
"엄마! 이것 좀 보세요!"라고 외치며 달려갔어요.
엄마가 칭찬하며 꽉 안아주길 기대하면서요.
하지만 통화 중이던 엄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보냈고,
통화가 끝난 후에도 그림을 대충 보고는 시큰둥했어요.
그 순간, 내 마음속 따뜻한 햇살이 사라지고 그 무서운 불안감이 다시 찾아왔어요.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하나의 규칙이 만들어졌어요. '
아, 내가 아무리 신이 나도 너무 시끄럽게 나대면 엄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사랑받으려면 얌전히 있어야 하는구나.'
이것은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내가 그 불안감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알아낸 생존 규칙이었어요.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 사랑받고 결핍감을 피하려는 절박한 선택이 '내사'가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규칙들이 모여 훗날 '이론가'의 목소리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이론가의 목소리가 야망가의 욕구를 억누를 때, 그 행동하지 못한 강력한 감정 에너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끝내지 못한 일'이 되어 우리 내면에 남아, 결국 그 날카로운 칼끝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립니다.
마치 필살기를 쓰기 직전에 멈춰버린 게임 캐릭터처럼, '예술가'가 되고자 동원되었던 모든 에너지는 당신 안에 갇혀 맴돕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결국 방향을 바꿔 당신 자신을 향합니다.
원인 모를 무기력함과 우울감
"역시 난 용기가 없어"라는 끊임없는 자기 비난
안정적인 삶 속에서도 느껴지는 공허함과 의미의 상실
때로는 두통, 소화불량과 같은 신체적 증상
이 모든 것이 바로 억압된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괴로움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당신이 느끼는 무기력함은 에너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엉뚱한 곳에 묶여 당신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전쟁을 끝내는 법
그렇다면 이 지긋지긋한 내전(內戰)을 멈추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해결은, '이론가'를 낡은 규칙으로 당신을 억압하는 상전으로, '야망가'를 철없는 욕망만 외치는 하인으로 여기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론가의 목소리는 당신을 실패와 상처로부터 지키려는 필사적인 방어 전략이며, 야망가의 목소리는 당신의 삶에 의미와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신성한 생명력의 외침입니다. 어느 쪽도 나쁜 놈이나 철부지가 아닙니다. 둘 다 당신을 위한, 당신의 일부입니다.
치유의 첫걸음은 이 두 목소리를 머리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론가의 경고 이면에 숨겨진 깊은 두려움에 공감해주고, 야망가의 외침 속에 담긴 순수한 열망을 인정해주는 과정입니다. "네가 왜 그렇게까지 나를 보호하려 하는지 이제 알 것 같아", "네가 얼마나 그것을 원하는지 마음으로 느껴져" 와 같이, 두 목소리 모두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죠.
이 두 목소리가 모두 충분히 존중받고 이해받았다고 느낄 때, 비로소 그 중간에 휩쓸리지 않는 '결정자로서의 나'가 바로 설 공간이 생깁니다. 이 결정자는 더 이상 이론가의 불안에 끌려가거나 야망가의 열정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그는 두 조언자의 의견을 모두 경청한 뒤, 두 목소리의 핵심적인 필요를 모두 고려한 제3의 길, 즉 창조적인 선택을 내립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 편한 선택'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쪽을 희생시킨 합리적 결정이 아니라, 내 안의 모든 부분을 끌어안고 함께 나아가는 '진짜 내면의 통합'입니다. 이 통합의 순간,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요구 앞에서 갈등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존중하며 삶을 창조해나가는 온전한 주체로 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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