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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Dec 05. 2019

D-100 프로젝트 < D-24 >

< 그땐 그랬지 >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후부터 생긴 나 습관. 하교하는 아이의 표정 살피기.

집에 없는 날은 어쩔 수 없지만 아이를 맞이하는 날은 들어서며 던지는 인사말의 미세한 떨림이나 표정의 작은 그늘도 민감하게 발견해낸다. 그런데 중3 이상의 아들들에게는 그것마저도 쓸데없는 짓인 듯하다. 높낮이도 없이 무미건조한 "다녀왔습니다."이거나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닌 ''無'의 표정.

그렇다고 절간처럼, 묵언 수행하는 스님처럼 입 꼭 닫고 사는 건 아니요, 하하호호 즐거운 대화도 많이 오고 가기는 하지만, 어린 시절 엄마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재잘거리던 장면은 이제 없다.


초보 엄마였고, 아이가 입을 열어 "엄마"소리만 해도 신통방통하던 시절, 그들과의 대화를 간간히 기록해둔 것이 있었다. 유치원에서 '마주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아이와의 대화를 기록하라고 했던 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기록을 들춰보니 이제 읽으면 하나도 신기할 것 없는 아이의 말들을 왜 그리 호들갑 떨며 적어놓았는지... 그중 보석 같은 장면 몇 가지를 살짝..


2005년 1월 28일. 큰아이 5살 때

아빠가 식사 도중 '꺼억~'하고 걸쭉한 트림을 했다.

호O : 그게 뭐나?(당시 아이가 애용하던 표현. ~나로 끝내기)

아빠 : 입으로 방귀 뀌는 거다 왜~

호O : 그러면 엉덩이로 말해라!


2005년 3월 31일.

부쩍 말을 안 듣던 아이에게 그날그날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생각하게 해서 점수를 매기도록 해보았다.

오늘은 호O가 먼저 자신의 점수를 물어봤다.

호O : 엄마, 나 오늘 몇 점이야?

엄마 : 백점이지~

호O : 아니야. 나 쪼끔 백점 아니야. 친구네서 놀다가 엄마가 가자고 할 때 바로 안 가고 잠깐만 잠깐만 했잖아.

엄마 : 그래도 나머지는 다 잘했으니까 백점이지.

호O : 그래? 엄마도 오늘 백점이더라. 내 친구 엄마들이랑 사이좋게 잘 놀더라~


2005년 8월 19일.

엄마 : 호O야. 엄마 뚱뚱해, 날씬해?

호O : 날씬해~

엄마 : 아니, 솔직히, 그냥 솔직하게 말해봐~

호O : 날씬하다니까!

엄마 : 고마워~~

호O : 엄마는 날씬한 게 좋다매...


2006년 3월 2일. 큰아이 6살 때

전등사로 놀러 가던 길.

엄마 : 호O야, 엄마는 절에 가야 맘이 편하고 아빠는 교회에 가야 맘이 편하대. 호O는 절에 한번, 교회에 한번 골고루 가보고 어디가 맘이 편한지 결정해봐~?

호O : 난 유치원 가면 맘이 젤 편해.


2006년 12월 14일. 작은아이 3살 때

형과는 달리 밥 먹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닌 호O이.

한입 먹이려고 하면 고개를 휙 돌리고, 또 한입 먹이려고 하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며 아직 입에 밥이 있다고 한다. 그러더니 한다는 말.

호O : 내 입은 지금 빨간 불이야.

엄마 :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호O : 이제 초록불이야. 아~~~~

신호등처럼 초록불일 때, 지 먹고 싶을 때 달라는...


2007년 1월 10일. 큰아이 7살 때

엄마 : 호O야~ 동생이랑 엄마는 찰흙교실 갈 거야~ 그동안 너는 플레이타임에 넣을게~

호O : 넣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거기가 감옥이야? 넣는다고 하게? 맡긴다거나 놀게 한다고 해야지~~


2009년 8월 14일. 작은 아이 6살 때

형 따라 닌텐도나 컴퓨터를 하고 싶을 때 그냥 시켜줄 수가 없어서 포인트 제도를 시행했다. 일주일 잘 보내면 포인트 30점, 엄마 도와주면 10점. 모은 포인트로 주말에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유치원 방학이라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엄마를 열심히 관찰하더니 하는 말...

호O : 엄마도 포인트 해야겠다. 포인트로 쇼핑하고 포인트로 장 봐~ 요즘 너무 장을 많이 보는 것 같아.



어렸을 때 생각지도 못한 말들로 엄마 아빠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고 미소 짓게 하던 그 아이들이 이제는 과묵한 청년들로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생각지도 못한 말들로 엄마 아빠의 마음을 심쿵하게 만든다.


2019년 11월. 큰아이 19살 때

엄마가 수능 100일 동안 매일 만원씩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립한 통장을 보면서...

호O : 이 돈은 못쓸 것 같아...

엄마 : 왜~ 널 위해 쓰고 싶은 것에 써~ 술 마시고 흥청망청 쓰지는 말고~. 무선 이어폰 사고 싶다며~ 그거 사~

호O : 아니야. 이건 엄마, 아빠를 위해 쓰는 게 맞는 것 같아.


2019년 11월. 작은아이 16살 때

호O : 나 법대를 가볼까? 아니면 경찰대학 가서 경찰이 될까?

엄마 : 왜? 공대 가고 싶던 거 아니었어?

호O : 뭔가... 나의 존재만으로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조잘조잘, 재잘재잘이 주절주절이 되고, 이제는 진중진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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