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크리스마스를 벌써 기다린다

by 늘봄유정

⭕ 라라크루 화요일엔 샛길독서 : 어린 왕자 6

( 라라크루에서는 화요일마다 윤병임 작가님이 독서의 샛길을 안내합니다. 함께 읽고 생각하여 글로 남기는 작업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길들인 것밖에는 알 수 없는 거야. 사람들은 이제 무얼 알 만한 시간조차 없어. 그들은 상점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모든 것을 사면 돼.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하나도 없지.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가 없는 거야. 네가 친구를 갖고 싶다면 나를 길들이면 돼!


One only understand the things that one tames, said the fox. Men have no more time to understand anything. They buy things all ready made at the shops. But there is no shop anywhere where one can buy friendship, and so men have no friends any more. If you want a friend, tame me...

(어린왕자, 21장)



남편과 둘이서만 맞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아마도 스물다섯 해 만일 것이다.


종교도 없으면서 꼬박꼬박 이브를 챙겼다. 스테이크를 굽고 파스타를 준비하며 서양인들을 따라 했다. 아이들이 잠들면 거창한 의식처럼 머리맡에 선물을 두었다. 순전히 아이들 때문에 벌였던 소동이었는데, 이젠 '아이'라고 불릴 존재들이 없다. 일하느라 늦게 귀가하는 큰아들과 여행 중인 작은아들은, 아마 내년에도 후년에도, 우리와 함께하기 힘들지 싶다.


남편은 평소에 눈여겨봐 두었던 파스타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데이트 신청이었다. 종일 집에 있던 아내는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남편은 버스 안에서 미리 메뉴를 고민하라고 했다. 먼저 도착해 주문하겠다는 것이었다. 파스타집에 도착한 남편은 웨이팅도 끝났다는 말에 당혹스러웠다.

"크리스마스에는 꼭 파스타를 먹어야 하는 거야? 사람들이 원래 파스타를 그렇게 좋아하나?"

겸연쩍었던지, 남편은 괜스레 투덜거렸다.

"미리미리 예약을 하고 불렀어야지~ 연인이었으면 차였다!!!"

사실 아내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오늘 같은 날 그런 인기 있는 식당에 예약 없이는 갈 수 없다는 것도, 남편이 예약했을 리 없다는 것도 말이다. 그러니 실망하고 짜증 내기엔, 이런 일은 너무나도 아무 일이 아니었다.


첫눈이 오던 날처럼 도로가 차로 꽉 막혔다.

"원래 크리스마스에 이렇게 사람들이 밖에 다 나오는 거야?"

남편은 의아해했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라 남편은 잊었나 보다. 그들도 연인이었을 때는 시내 한복판의 무리에 섞여 있었다는 것을.


파스타 말고 짜장면이나 치맥을 먹어도 좋다는 아내의 말에도 남편은 고집을 부렸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파스타를 사주고 싶다고 했다. 남편의 마음이 고마워서 아내는 순순히 따랐다. 결국 집 근처에 있는 파스타집으로 갔다. 아르바이트생은 부부의 주문을 까먹어서 두 번이나 확인하러 왔으며 컵을 두 번이나 와장창 깨뜨렸다. 아들들에게 '우리는 잘 지내고 있다~'며 음식사진을 찍어 보냈지만, 파스타 맛은 별로였다. 그래도 배불리 먹은 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누워 나른한 저녁을 보냈다.



어린 왕자에는 '길들인다'라는 것에 관한 여우와의 대화가 나온다.

"길들인다는 게 뭐지?"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환히 밝아질 거야."

"너의 발자국 소리는 땅 밑 굴에서 나를 밖으로 불러낼 거야."

"너는 금빛 머리칼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나에게 너를 생각나게 할 거거든.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야."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어느 하루를 다른 날들과 다르게 만들고, 어느 한 시간을 다른 시간들과 다르게 만드는 거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참을성이 있어야 해."

"오직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드는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간이란다."

"너는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마을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까지 가야 하는 수고를 했어도, 기대하던 파스타를 못 먹었어도, 막히는 도로 위에 지루하게 서 있었어도, 주문이 안 들어가서 한참을 멀뚱히 있었어도, 직원이 컵을 여러 번 깼어도, 파스타가 맛없었어도 다 괜찮았다. 다음 크리스마스가 오기 며칠 전부터 오늘을 기억하며 행복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이야기하며 깔깔깔 웃을 테고 우리 둘만 아는 오늘의 이야기가 서로를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하루였던 것처럼 인생도 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하지만 부부는 그 시간을 함께 소비하며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이자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길들인다는 말이 다소 동물적이고 일방적인 단어로 들리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서사와 숱한 갈등, 인내와 화해가 들어있다. 상호작용 없이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상태가 길들임인 것이다. 길들여진 후에 오는 편안함이 꽤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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