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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y 23. 2020

마흔다섯 번째 시시콜콜

심란하다.

실망스럽다.

절망스럽다.

30년간 일본군 성노예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한 단체의 부실한 회계.

국회의원이 된 그 단체의 핵심인물이자 시민단체 활동가를 향한 비난.

'나눔의 집' 후원금 사용처 관련 의혹.

정파성을 벗어나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단체로서 상징적인 지위를 누리던 곳이었기에 사람들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더 큰듯하다.

억대의 기부를 했던 유명인들이나 기업가들뿐만 허탈하겠는가.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면서까지 수요집회에 참여해 노란 포스트잇에 "할머니~ 힘내세요~"라는 편지를 적어 붙이고 나눔의 집에 찾아가 숙연해하던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할까... 어른으로서 민망하지 않을 수 없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고 돈이 꼬이는 곳에 비리가 없겠느냐마는, 단체의 설립 취지와 목적이 가진 무게를 알기에 함께하는 활동가들과 단체에 대해서도 맹목적인 지지와 신뢰가 있었다. '성역'이었다는 표현을 쓰는 것에 언론도 조심스러운 걸 보면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사안의 엄중함'이라는 울타리 때문이었으리라. 누군가의 피맺힌 한을 풀어주기 위한 투쟁을 함께한 이들이기에 물질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야 한다는 연대의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전폭적 지지를 보내던 단체의 부정은 의혹만으로도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으면 된다.

회계가 부실했거나 기부금의 오사용이 의심된다면 감사도 받고 외부 전문가를 영입 하든 해서 개선하면 된다. 국민적 아픔을 도구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운 이가 있다면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로 엄벌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책임은 없을까? 내부고발자들의 발언에 따르면 외부에서 어떤 감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하니,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준 성역이요 완장이었는지도... 맹목적인 지지와 신뢰라는 이름의 '방치'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손목에 노란 팔찌를 차고 가슴에 나비 배지를 단것으로 자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할머니 개개인의 삶에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가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있던가? 축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월드컵 한일전에서는 당연히 한국을 응원하는 그 마음과 같은 맥락의 무관심한 지지와 연대. 우리는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의 Topic은...

< 정의연과 나눔의 집 문제는 사회 모두의 책임이다.>


* 이때다 싶어 흥분한 언론과 일본 우익들 보기가 창피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창피한 것은, 잘못된 것을 알고도 드러내지도 않고 바로잡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려운 걸 늘 해내는 민족이다.

비리의혹으로 인해 시민운동과 후원이 위축될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운동을 그만둘 이유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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