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대적 박탈감 > 다른 대상과 비교하여 권리나 자격 등 당연히 자신에게 있어야 할 어떤 것을 빼앗긴 듯한 느낌. 자신은 실제로 잃은 것이 없지만 다른 대상이 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상대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잃은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
현 정부의 22번째 부동산 정책이 발표되었다.
첫 번째부터 22번째 정책에 이르기까지 줄곧 목표는 하나일 것이다.
집값을 안정화해 서민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
현 정부뿐 아니라 역대 어떤 정부에서도 이루지 못한 꿈.
늘 실패한 정책.
여태껏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부동산이라는 것은, 더 나아가 경제라는 것은 다양한 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의 조건만 조정한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정부도 이런저런 시도를 끊임없이 해보는 중일 것이다. 집이 투자나 투기의 수단이 아닌 필수재로써의 제 역할을 찾을 날이, 언젠가 올 것이다.'
그런데 어제 나온 기사들은 내가 얼마나 순진한, 무지몽매한 환상에 사로잡혀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수도권 다주택 보유자들에게 한채만 남기고 처분하라던 비서실장 역시 서울과 청주 두 곳에 주택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스로 권고를 이행하는 차원에서 한 채를 매물로 내놨지만 반포의 아파트는 보유의사를 밝혀 여론의 뭇매만 맞았다. 지자체장들의 다주택 보유현황, 그것도 실거주지가 아닌 서울 강남의 주택 보유현황 기사는 서민들로 하여금 '다 의미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지도록 했다. 지역 맘 카페도 덩달아 시끄러웠다. 집을 팔아야 하나요, 사야 하나요, 이 정부도 마찬가지네요, 정책을 믿고 기다려봅시다....
가장 부르르 떤 것은 남편이었다.
현 정부를 지지했지만 극단적으로 돌아선 그였다. 3년 전 모두가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이 바뀔 것이라 믿었고 새로운 지도자가 그 일을 해내 주리라 믿었지만 바뀐 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오히려 서민이 느끼는 상실감은 더 커졌다고 했다. 서민 감수성 떨어지는 위선자들이 주변에 득실거리니 지도자가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데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다.
"아파트 팔라면서 살지도 않을 13평짜리 반포 아파트는 왜 가지고 있는 거지? 팔라고 하지를 말던가. 청주, 반포 집 중에 청주 집을 팔았다는 건 자기는 강남 집값이 안 떨어질 거라 생각하는 거잖아. 재수 없어!"
"다음 선거엔 무능한 나쁜 놈 보단 유능한 나쁜 놈 찍을 거야."
그렇게 그는 열불 난다는 문자 폭탄을 아내에게 보냈다.
그렇게 그는 물회 한 사발에 소주를 마시며 정부를 욕했다.
그렇게 그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서민이 할 수 있는 몸부림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상대적 박탈감'은 가변적이다.
비교 대상을 자의적으로 바꿀 수 있고 박탈감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희망적이다.
대상을 무엇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적 박탈감'은 지배층의 논리이다.
"너희들이 느끼는 것은 남과 비교하는 마음 때문이야. 네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순간의 행복에 감사하며 살아야 해!"라고 말함으로써 서민들이 현실의 불평등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프레임.
그렇게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온 우리는 몰랐다. 그 박탈감은 상대적인 게 아니라 절대적이었음을. 언젠가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어서, 대상을 바꾸고 내 생각을 바꾼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지키려는 이들은 '절대적인 부와 권력'을 원하지 상대적인 것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다는 것을...
오늘 중3학생들의 역사 디베이트 주제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다. 지키려는 자와 바꾸려는 자, 모두가 그놈이 그놈이었던 세상...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를 통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위정자가 아닌 서민들의 세상엔 바뀌는 것이 없음을 알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독립혁명이니 대혁명이니 하는 것들로 자유를 얻었노라 역사는 진보 하노라 하지만 그 조금의 빵조가리를 받고 가진 자와 구분해 놓은 담벼락 높이를 더 높이는데 동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