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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ug 15. 2020

이유 없이 좋을 때 사랑하겠습니다.

남편은 만류했다. 이 시국에 종교 얘기는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지만 이건 종교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어어 엉~~~ 유정아, 넌 왜 알지를 못하니. 어어어 엉~~~. 하나님은 널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그래서 날 보내셨는데 넌 왜 그걸 알아채지를 못하니~~~"

"..."

"주님...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오늘 2008년 5월 8일. 유정이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너도 오늘을 꼭 기억해! 난 너한테 전했다!"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내 인생에 적잖은 충격이긴 했나 보다. 1년 남짓 함께 헬스를 하며 친해진 언니는 그렇게 펑펑 울며 복음을 전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서먹해졌다. 그렇게 소원해진 관계는 또 있다. 지금의 집에 이사오자마자 석화며 김이며 박스채로 전해주시던 앞집 부부는 당신들이 다니는 교회에 초대하셨다. 아이들도 어리고 남편도 주말 근무가 많았던 때라 엄두가 나지 않아 거절했는데  이후로 한동안 인사도 받아주지 않으셨다. 지금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평범한 이웃이 됐지만 그러기까지 15년이 걸렸다.


기독교인들은 날 참 좋아했다. 늘 주님의 품 안에 날 이끌고 싶어 했으며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얼마 전 참석한 모임의 구성원 모두가 기독교 신자였다.

"왜 교회 안 다니세요? 딱 교회 언니처럼 생겼는데?"

전형적인 교회 오빠 스타일은 알겠는데 교회 언니라는 말은 생소해서 그게 뭐냐고 물으니,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고 하셨다. 교회 언니처럼 생겨서인지, 종교가 필요하게 생겨서인지는 몰라도 모두가 날 교회에 데려가고 싶어 했다.


남편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션스쿨 고등학교를 나오고 매형이 목사님이며 이모가 장로님이셨던 남편은 결혼초 늘 교회에 목말라했다. 일요일에 잘 차려입은 가족들이 한 손에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갔다가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는 풍경을 원한다고 했다. 교회에 가서 기도만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다고 협박 아닌 협박도 해왔다. 그 작은 소원도 들어주지 못했다.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이던가.


까짓것 그냥 다니면 되지 뭘 그리 까탈스럽게 구냐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친한 언니가 날 아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려고 그렇게까지 애원했는데 내치다니 냉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별 수 없다. 미안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날 위해 기도해주는 모든 분들의 마음은 참 고맙다. 누군가 타인의 무사안일, 행복을 위해 빌어준다는 것은 반드시 감사해야 할 일이다. 거기까지다.


"그 사람이 왜 좋아?"라고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냥! 왠지 좋아."

"느낌이 좋아."

"이유 없이 좋아."

어쩌면 이 말은 위선일 수도 있다. 얼굴이 잘생기고 예뻐서, 돈이 많아서, 성격이 좋아서, 나랑 잘 맞아서, 내 얘기를 잘 들어줘서, 능력 있어서 등등 다양한 조건을 숨겼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는 자신이 열망하는 조건으로만 상대를 찾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말로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 좋아했던 이유와 조건이 사라지는 순간 고통만이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 없이 좋아하는 상대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한다. 좋아했던 구체적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슬슬 단점이 보이더라도 그게 이 사람을 싫어할 결정적 이유가 될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겐 기독교가, 더 나아가 종교가 그런 존재다.

내가 힘들고 지쳤을 때 위로받고자 종교를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 자신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나 자신도 풀지 못하는 나의 숙제를 실체도 없는 무엇에 의지한다면 그나마 낮은 자존감을 높일 명분이 없을 것 같아서이다.

내가 지른 과오와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종교를 갖고 싶은 마음도 없다. 큰 죄를 지었다면 법이나 사회의 심판을 받던가 나 자신, 혹은 나로 인해 상처 받은 당사자에게 직접 용서를 구하고 싶지 상관도 없는 곳에서 회계하고 '끝'을 외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생각만 해도 피식피식 미소가 지어지고, 안 보면 보고 싶고, 늘 함께하고 싶고, 그 사람의 어떤 잘못도 다 용서할 수 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은데 그 이유를 모르겠을 때.

옛날엔 어땠는지 궁금하고,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고, 어떤 꿈을 꾸는지 궁금할 때.

그럴 때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이유도 모른 채.

난 그럴 때 누군가의 애정 어린 손길 없이, 꾸준하고 장황한 설명 없이, 구구절절한 사연 없이, 은근한 회유 없이 스스로 주님이든 부처님이든 그게 누구든 사랑에 빠질 생각이다.


누군가의 꾸준한 설명과 회유, 강요 혹은 오열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사랑이라면, 이미 그건 사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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