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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26. 2020

Day 1. Los Angeles

첫날부터 아쉽다.

온 식구가 들뜬 표정으로 공항에 모였다. 열흘간의 옷가지만으로도 짐이 한 보따리인데 거기에 미국 가족들을 위한 선물, 여행하면서 먹을 간편식, 결혼식에서 입을 정장까지 챙기느라 짐이 많았다. 짐이야 아무렴 어떻겠는가. 여행인데 걱정할게 뭐가 있단 말인가. 여행인데...

수속을 마치고 인터넷 면세점에서 주문했던 물품들을 찾고, 면세점을 둘러보고, 또 쇼핑을 하고... 이쯤 되면 여행의 시작은 면세점이 아닐까. 살게 있어도 사고 없어도 사고, 싸서 사고, 사고 싶어서 사고... 산다는 것에 어떤 죄책감도 들지 않게 하는 마력이 있는 여행길의 면세점.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을 실감하는 곳이다.


LA까지 비행시간은 10시간이 넘었다. 새로 운항이 시작된 A380은 좌석도 편안하고 창가 쪽에 콘솔박스가 있어 수시로 필요한 짐을 넣어놓기 편했다. 기내식 두 끼를 먹고 영화를 몇 편 봐도 끝날 것 같지 않은 지루한 시간을 아이들은 용케도 즐겼다. 개인 모니터를 이용해 영화와 게임을 실컷 즐길 수 있었는데, 동생의 4살짜리 아들이 문제였다. TV도 시간 정해 틀어주고 웬만해선 휴대폰도 쥐어주지 않는 엄한 엄마 밑에서 자란 조카에게 개인 모니터는 신천지였다. 장시간의 지루한 비행을 4살짜리 아이가 떼쓰지 않고 잘 견뎌내기만을 바라는 동생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허용된 10시간을, 조카는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다. 여행 첫날 일정을 소화하려면 조금이라도 자 두어야 했는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모니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날이 안 올 거라고 생각한 것처럼 말이다.


드디어 도착한 LA 날씨는 LA 날씨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딱 좋은 온도의 바람, 을 느낄 여유도 없이 죽어라 뛰었다.

사실 이 여행에는 동행이 있었다. 우리 집 식구 열명뿐 아니라, 결혼하는 사촌동생의 외가 어르신들 여덟 분도 함께였던 것이다. 평균 연령 65세에 해외여행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 짐 부치는 것부터 도와드려야 했다. LA에서는 헤어져 그분들은 바로 피닉스의 작은댁으로 가시고 우리는 여행길에 오를 예정이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일정을 보내다가 결혼식을 끝으로 함께 여정을 마무리하는, 처음과 끝을 함께하는 동반자인 셈이었다.

그런데 그분들이 타기로 한 피닉스행 국내선 시간이 촉박했던 것. 영어도 못하고 LA 국제공항의 지리도 잘 모르시는 분들이니 알아서 가시라 하고 우리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나와 남편은 그분들의 짐을 끌고 얼마 남지 않은 보딩 시간을 부여잡기 위해 내달렸다. 탑승시간이 끝났다는 직원을 향해 되지도 않는 영어를 해가며 겨우겨우 태워 드리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과 함께, "LA다~~"를 외칠 수 있었다.


셔틀을 타고 예약해둔 렌터카를 찾으러 갔다. 식구가 열, 가방이 열이니 셔틀 하나 타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원래 예약해둔 차량이 사진에 비해 작아 큰 차량으로 변경을 했고 외관을 꼼꼼히 확인한 후 짐을 싣고 드디어 탑승... LA 시내를 향해 출발하면서 한국을 떠난 홀가분함과 남의 나라에 온 흥분을 실감했다.


흥분은 이내 피로로 몰려왔다. 비행기에서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한데다 도착과 함께 공항을 뛰어다닌 탓에 일단은 호텔로 가 쉬는 게 시급했다. 예약한 호텔로 가 잠깐의 휴식을 하던 그때, 뜻하지 못한 위기를 맞닥뜨렸다. 비행기에서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조카가 코피를 쏟기 시작한 것. 조금 흐르다 마는 정도가 아니었다. 울컥울컥 핏덩어리를 동반한 코피가 무섭게 쏟아졌다. 그러더니 이내 쓰러져 잠을 잤다. 한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난 아이는 백지장이 된 얼굴로 또 코피를 쏟아냈다. 온 식구가 아이 주변에 둘러앉아 발을 동동 굴렀다. 수건에 찬물을 적셔 콧잔등에 얹어도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휴지를 돌돌 말아 코를 막자마자 휴지는 코피를 흠뻑 먹었다. 119, 아니 911을 불러야 하나, 응급실에 가야 하나, 외국인에겐 비싸다던데, 온갖 고민을 하다가 그저 솜이나 사서 막아주기로 결정했다. 특별한 증상은 없으니 지혈만 잘해주면 넘어갈 것이라 여긴 것.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아이가 걱정되면서도 모두들 내심 여행 첫날 어디라도 가야 한다는 욕심이 앞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근처 마트로 갔다. 면세점 다음으로 여행을 즐기는 장소가 현지 마트다. 별거 없고 우리나라 물건, 음식이 더 좋다는 걸 알면서도 외국 마트에 가면 괜히 행복하다. 껌 하나도 들여다보게 되고 혹시 모를 희귀템을 찾아 돌아다닌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휙 돌아간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차렸다. 지혈을 위한 솜과 과일, 음료, 물을 사며 아쉽지만 간단한 첫 쇼핑을 마쳤다. 아이와 함께 차에 앉아 있는 동생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미 지친 동생과 조카는 호텔에서 쉬고 싶었겠지만 다른 가족들을 위해 시간을 양보했다. 저녁도 먹어야 했고 LA 입성 첫날밤을 호텔방에서만 보낼 수 없어 아쉬워하는 가족들을 위한 배려였다.


저녁 식사 장소는 레돈도 비치였다. 깜깜한 밤이라 바닷가 풍경은 볼 수 없었지만 바로 쪄주는 킹크랩을 나무망치로 두드려먹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10년 전에도 와봤던 식당이지만 초행인 작은아버지와 조카 둘을 위해 다시 방문했다. 시장에서 쪄주는 게를 포장해 호텔에서 먹으면 더 싸게 먹을 수 있었겠지만, 우리 모두는 너무 허기졌고 호텔방에 가서 차리고 치우는 번거로움을 오늘만은 피하고 싶었다.

'게'는 그렇다. 열심히 손을 놀려 먹지만 정작 많은 양을 먹지는 못하는 것, 하지만 먹는데 시간이 걸리니 어느 순간 포만감은 오는 것. 다행히 레돈도의 킹크랩은 살이 많았다. 정신없던 하루의 피로를 망치질로 해소하며 배부르고 기분 좋은 저녁 식사를 마쳤다.


다행히 조카의 코피는 진정이 됐다. 오늘 밤 푹 자기만 한다면 피로도 회복될 것이다.

완벽한 여행은 서로에 대한 배려로 가능하다. 크고 작은 돌발상황에서 정신을 차려 해결책을 찾는 것도, 하루를 돌이켜보며 행복하게 잠들 수 있는 것도...

이렇게 여행 첫날이 정신없이 끝나간다. 벌써부터 아쉽다.

201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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