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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25. 2020

내일, 떠납니다.

여행 전날이 가장 즐겁다.

오래 기다리고 준비했던 가족 미국 여행이 내일로 다가왔다. 반년 동안 차곡차곡 준비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 네 식구, 제부를 제외한 동생네 세 식구, 작은아버지까지 도합 열명. 단출한 네 식구 여행과는 스케일이 달라 준비할게 여간 많은 게 아니었다. 호텔방도 최소 세 개는 필요하고 렌터카도 사람과 짐을 한 번에, 안락하게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우르르 우왕좌왕하지 않으려면 동선도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 어디를 갈 것인지 무엇을 먹을 것인지 뭘 할 것인지까지 계획하지 않으면 엉망이 되기 십상이다.


일단, 제일 중요한 건 돈이었다. 돈만 준비되면 여행의 즐거움 중 반 이상은 보장된 것이리라. 열명이 열흘간 움직이는데 필요한 비행기 값과 숙박비, 식비, 기타 경비까지 고려해 최소 200이라고 계산했다.  열명이면 2,000만 원. 이건 어머니 아버지가 이미 준비해 놓으신 상태였다. 부유한 집의 럭셔리한 가족여행이 아니었다. 동생 아이들을 돌봐주시고 받은 월급을 차곡차곡 모은 어머니의 쌈짓돈에, 여름 뙤약 빛 아래서 검게 그을려가며 모은 아버지의 피땀 눈물이 빚어낸 귀한 시간. 그러니 자식들이 할 일은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가치 있게 쓸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었다.

맏사위인 남편이 총감독을 맡았다. 동생과 내가 알아보고 의논했지만 최종 결정과 전반적인 일정 조정은 남편이 했다. "너희들이 알아서 잘 짜 봐~"라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우리 셋이 척척 준비해왔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큰 고모의 칠순 잔치와 사촌동생의 결혼식 참석이다. 미국으로 이민 간 가족들과는 그런 대소사가 아니면 함께 모이기 쉽지 않았다. 미국 가족들이 여러 차례 한국에 오셨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갈 차례. 여행 일정도 자연히 그 날짜에 맞춰야 했다.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칠순과 결혼식이 예정되어있다. 여행 열흘의 마지막 사흘을 그 일정에 맞추고 앞쪽의 7일이 우리의 여정이 된다. LA 공항에 내려 피닉스까지 일주일. 어떤 경로로 어떻게 가며 어디에 묵고 무엇을 할지... 막막하지만 차근차근 준비했다.


일단 굵직한 일정을 그렸다. LA, 팜스프링스, 라스베이거스, 그랜드 캐년, 앤틸롭 캐년, 세도나, 피닉스로 이어지는 러프한 일정을 짜 놓고 나머지 촘촘한 일정을 채워 넣는 방식. '무릇 여행이란,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하는 남편이 지휘를 맡았으니 일정의 촘촘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긴 그렇게 꼼꼼히 계획해 놓아야 포기할 건 포기하고 남길건 남길 선택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남편이 작성한 여행 일정표. 여행사 차려도 될 정도...

날짜별 여행지를 정해놓으면 그날 묵을 숙소를 정했다. 매끼 사 먹을 수는 없으니 아침, 저녁은 숙소에서 편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으면 좋을 듯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취사가 가능한, 우리나라 콘도 개념의 시설로 예약했다. 방 여러 개와 주방이 있는 큰 객실 하나와 잠만 자는 작은 객실 하나만 예약해도 쾌적하고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호텔 홈페이지와 예약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사진과 리뷰, 가격만을 보고 정해야 했다. 사전답사 따위는 할 수없으니 최선을 다해 찾았다. 나, 동생, 남편 셋이 각자 찾아 취합을 하고 동선에서 먼 곳, 비싼 곳, 룸 컨디션이 별로인 곳은 제외하며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곳으로 예약하는 식. 나름 합리적인 과정이었으니 결과도 만족스럽기를 기대한다.


이번 여행을 위해 오랜 시간 가장 많은 준비를 한 것은 남편이었다. 미국 렌터카 사이트를 몇 날 며칠 돌아보고 회원가입을 하며 알아낸 사실은, 10명이 타고 짐을 실을 만한 차를 대여하려면 국내 대형 버스 면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년 넘게 운전을 하고 살았고 운전병 출신이니 운전쯤이야 겁나겠냐마는, 버스 운전은 생소한 영역이었다. 60만 원이나 하는 운전면허학원 교육비가 아까웠던 남편은 묘수를 뒀다. 시험 인지세가 회당 17,000 원이니 10번 안에 붙는다는 각오로 무작정 시험을 치르겠다는 것. 실기시험의 전략과 팁은 youtube를 통해 숙지했다. 결국 다섯 번 만에 버스 면허를 땄고 당당히 렌터카 예약을 마쳤다. 미국에서 운전을 할 수 있다는 면허도 됐지만, 회사에서 잘려도 버스기사 하면 된다는 뒷배도, 얼떨결에 마련한 셈이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6개월 전 예약해 비교적 싸게 끊어놓은 비행기표, 동선에 맞게 위치한 호텔, 각 지역에서 꼭 가볼 곳과 먹어야 할 것들, 라스베이거스에서 볼 쇼 예약, 날씨에 맞는 옷가지와 필요물품을 담은 여행가방, 이 모든 것이 기록된 스케줄 표. 이제 오늘 푹 자고 내일 공항으로 향하면 된다. 원래 여행은 여행 전날이 가장 즐거운 법이다.



엥? 코로나 시국에 왠 미국 여행? 다녀와서 열명이 자가 격리하는 것까지 각오한 여정인가?

싶으시죠?

얼마 전 친정부모님과 식사하던 중, "언제쯤 다시 여행 갈 수 있을까... 이번엔 동부 여행 가야 하는데..." 하시던 어머니 말씀에 5년 전 여행이 떠올랐습니다.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하며 사진을 찾아보니 9월 26일부터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공교롭게 요일마저 일치하더라구요. 2015년 9월 26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명이 함께한 여행을, 전 앨범조차 만들어두지 않았요. 그래서, 여행은 커녕 동네 슈퍼 가는 것도 큰 맘먹어야 하는 이 시국에, 용감히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습니다. 5년 전의 여정을 따라가며 매일을 소환해내 방구석 여행을 떠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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