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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01. 2020

Day 6. Antelope Canyon

부지런한 자연, 부지런한 여행객.

새해 첫날 일출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우리 가족이지만 그랜드캐년에서의 일출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비싸지만 공원 내 숙소를 잡은 이유도 순전히 일출 때문이었다. 그러니 늦잠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직 깜깜한 새벽, 알람에 맞춰 일어나 차가운 공기를 헤치고 협곡으로 갔다. 일출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도 경건히 해를 기다렸다. 더디게만 느껴졌던 해가 후루룩 떠오르자 모두들 눈에, 사진에 그 모습을 담으려 분주했다. 해를 기다린 건지, 해가 떠오르며 만들어내는 협곡의 신기로운 모습을 기다린 건지 모르겠지만 단잠을 포기할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일출 감상의 여운을 빠르게 씻어내고 바로 출발해야 했다. 11시에 예약해둔 다음 행선지까지 3시간 반을 달려야 했기 때문. 끊어내지 못한 잠 기운이 차 안에 가득했다. 나중에 남편은 말했다. 그 역시 잠과의 사투를 벌이며 운전했노라고... 중간중간 잠시 차를 세우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기지개를 켜고 커피도 마셔가며 운전했지만  몇 번은 졸았던 것 같기도 하다고...

지난 일이어도 아찔하다.

이동하는 내내 옆으로 이런 풍경이 펼쳐졌다.

10시 반경 도착한, 우리 여행의 야심작과 같은 장소는 <앤틸로프 캐년(Antelope Canyon)>이었다. 그렇다. 바로 그곳이다. 윈도우 배경화면으로 많이 쓰이는 그곳. 이런 곳이 실제 있을까 싶은 그곳.

1930년대 인디언 소녀가 잃어버린 영양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이곳은 상층 협곡과 하층 협곡으로 나뉜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네 없네 다양한 평들이 있지만 우리가 하층 협곡을 선택한 이유는, 일단 상층보다 입장료가 저렴하고 주차장에서 가깝다는 이유였다.

이곳 역시 그랜드캐년처럼 누구에게나, 언제나 멋진 풍경을 선물하는 곳은 아니다. 비 예보가 있으면 예약했더라도 관람을 할 수가 없다. 비가 오면 협곡이 물길로 변해버려 그대로 갇혀 사고를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날이 너무 좋았다.


예약을 했어도 한참을 기다렸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촘촘히 예약하다 보니 조금씩 밀리는 모양이었다. 나바호 인디언 가이드의 인솔을 따라 시작된 투어는 약 한 시간 남짓 이어졌다. 평지보다 한참 아래에 위치해 있는 탓에 좁고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어린 조카들을 다 같이 챙겨가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내려가서도 좁고 구불구불한 협곡을 지나가야 했지만 그런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닌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협곡과 빛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모습은, 이곳이 흡사 외계 행성인가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계속 걸어가다 보면 슈퍼맨이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광경.

난,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을 담은 사진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이곳만큼은 달랐다. 여행 내내 가장 많은 사진을 찍은 곳이며, 사람보다 풍경을 더 많이 찍은 유일한 장소다.

모래놀이가 더 즐거운 조카들...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 아쉬운 발걸음을 뗐다. 이제는 슬슬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내일쯤엔 스코츠데일 고모댁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 그 중간지점인 프리스콧(Prescott), 고모의 별장까지는 가야 했다.

도중에  <세도나(Sedona)>에 들렸다. 돌아가신 고모부의 수목장 나무가 있고 위패를 모신 교회도 위치한 곳이다. 친지 방문이라는 이번 여행의 목적을 오늘부터 제대로 실천했다. 그 산이 그산 같고 그 나무가 그 나무 같은 곳에서 아버지가 지목하신 나무에 목례를 했다. 몇 년 전, 장례식에 참여하신 아버지가 단 한번 방문했던 장소였다. 오로지 아버지의 기억에만 의지했다는 것이 께름칙했지만 뭐 어떠랴... 마음을 담아 인사드렸으니 전해졌겠거니 해야지...


붉은색 사암 암벽과 봉우리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한 이곳은 10년 전 아이들이 왔을 때도 방문했던 곳이다. 큰 아들은 과거 사진을 찍었던 장소를 지나치지 않고 그때 그 포즈 그대로 사진을 찍었다. 10년 전 모습이라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는 도시와는 달리 자연은 그대로구나...싶다가도 묘하게 달라져있는 자연이 새삼 신비롭다.

큰아들의 10년전과 오늘...

별장으로 들어가기 전, 허기를 참지 못한 가족들은 보이는 아무 곳이나 들어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겨우겨우 찾아 들어간 곳은 멕시칸 음식 전문점이었다. 기본으로 나초가 깔렸다. 메뉴판에 best 표시가 돼있는 음식들로 여러 개를 시켜 먹었는데 꽤 만족스러운 저녁이었다. 나오면서 보니 올해의 베스트 레스토랑으로 뽑혔다는 인증패가 여러 개 붙어있었다. 인증패에 큰 의미를 부여해도 될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뜻하지 않게 현지 맛집을 찾아냈다는 안도감에 기분이 좋았다.

고모는, 생전의 고모부와 가끔씩 들러 며칠 혹은 몇 달씩 기거하시던 별장을 우리의 잠자리로 내어주셨다. 며칠 전 들러 잠자리와 먹거리를 챙겨놓으셨다는 별장은, 깔끔한 고모의 성격대로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5일 동안 호텔을 전전하던 우리는 모처럼 가정집에서의 편안한 밤을 보낸다.

지난 5일 동안 매일매일 바빴지만 오늘은 이동거리도 꽤 되고 유난히 많은 일을 한 기분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이번 여행에서 게으름은 용납되지 않았다. 정해진 스케줄 중 어쩔 수 없이 포기한 장소들은 여럿 있었지만 그럼에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소화 가능한 일정이었다.


어김없이 뜨고 지는 해와, 그 해를 맞으며 끊임없이 모습을 바꿔가며 보여주는 협곡.

그들의 부지런함에 대한 예의를 갖추듯,

우리는 부지런한 여행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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