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라스베이거스를 떠나 그랜드캐년으로 가는 여정에 올랐다. 4시간 넘게 걸리는 길 중간에 후버댐과 Route 66에 들르기로 했다.
인류 역사에 남을 토목 공사 중 하나로 꼽힌다는 <후버댐>은 뉴딜정책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웅장한 규모와 수려한 아치형 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함을 느끼게 했다. 결혼 전 남편과 여행 왔을 때 내부까지 둘러보는 투어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아이들도 있고 해서 외관만 구경했다. 트랜스포머 1에서 메가트론이 갇혀있던 비밀기지로 등장했던 곳이라 아들들에게도 흥미로운 장소였다.
그랜드캐년으로 가는 경로에는 Route 66이 포함되어 있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Cars>의 배경이 된 곳으로 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 도로이다. 캘리포니아 드림을 꿈꾸며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을 그 오래된 길은 이제 몇몇 상점만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고 이곳 역시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들른 곳은 그 도로의 발생지가 된 작은 휴게소 마을인 <Selligman>이었다. 작은 상점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상점 앞에는 영화 <카>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차량들이 세워져 있어 아이들에게도 인기 만점이었다.
기념품 가게 옆 한적한 도로가에서 피크닉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기다란 화물열차가 느릿느릿 한참을 지나가는 기찻길 옆에서 마트에서 사 온 로스트 치킨을 먹고 있노라니 대륙을 횡단 중인 서부 개척자가 된 기분...
망중한을 즐긴 우리는 그랜드 캐년의 일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렀다. 그랜드 캐년에 도착해서는 셔틀을 타고 멋진 일몰로 유명한 스폿을 찾아가야 했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안내 방송을 잘못 알아듣는 바람에 반대 방향으로 가는 셔틀로 타버렸다. 하마터면 인생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절경을 놓칠뻔했지만 열명이 우르르 탔다가 우르르 내리면서도 뭐가 좋은지 깔깔거렸다. 다행히 석양이 가장 멋있다는 스폿에 제시간에 도착해 일몰을 감상했다. 협곡과 태양빛이 만들어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대자연의 위용 앞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숙연해졌다. 그랜드 캐년은 언제나, 아무에게나 멋진 절경을 선사하지 않는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인 나조차도 역대 가장 멋진 풍경을 선물 받았다. 언젠가는 지독한 안개 탓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적도 있었기에 온 가족이 함께 감상할 수 있었던 오늘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묵을 호텔은 야바파이 로지이다.
내일 아침 일출도 놓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어렵게 예약한,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 안에 위치한 숙소. 취사도 불가능하고 근처에 저녁식사를 해결할 장소도 마땅치 않아서 따뜻한 물에 겨우 데운 햇반을 김에 싸서 먹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간단하다고는 하지만 아보카도와 고수, 단무지를 함께 싸서 먹으니 나름 괜찮은 저녁이었다.
먼 거리를 움직이다 보니, 운전을 하는 남편과 조수석에 앉은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은 차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때웠다. 주변에 볼거리라고는 거의 없는 광활한 대지, 그 사이에 휑하니 놓인 도로를 운전하던 남편이 졸리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나 역시 졸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어찌나 미안하던지...
남편의 희생으로 편안하고 안전한 여행이 가능했다. 처갓집 식구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는 것만으로도 피곤할텐데... 묵묵히 운전하고 함께하는 남편이 참으로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