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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Dec 02. 2020

언니의 지령

"잘 지내지?"

이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사람이 있다.

수년 전 우리 동네를 떠나 반포로 이사 간 친한 언니의 메시지다. 사채업자에게서 온 메시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큰 빚을 진 채무자의 심정이 된다.


팝업으로 메시지가 뜨자마자 읽지도 않고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지'밑에 다른 용건이 붙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전화해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꼭 꼭 이렇게 문자를 보내야 그제야 통화 한번 할 수 있는 거지? 하하하하"

여태껏 꽁해있었지만 전화했으니 모든 죄를 사해준다는 듯한 말투로 언니는 날 품어주었다.


언니의 남편은 약 10년 전 짧은 암투병을 끝으로 세상을 등졌다.

아직도 그날이 기억난다. 아이들 유치원 버스를 태워 보낸 후, 남편이 이상해졌다며 길에서 한참을 얘기하던 언니였다. 성격이 갑자기 괴팍스러워졌다고 했다. 이 사람이 미쳤나 싶을 정도로 달라졌다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남편이 암에 걸렸노라고, 호르몬의 이상으로 그런 이상 행동을 했던 거라고 했다. 이미 진행이 많이 된 상태였던 그는 반년만에 돌아가셨다. 고3, 고1 아들들과 늦둥이 초1 딸을 남겨두고...


아들들의 대학 입학과 함께 언니는 용인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했다. 남편이 생전에 하던 사업체를 바로 처분할 수 없어 그간의 인맥에 의지해 간신히 운영을 했다. 두 아들을 대학 보내고 나서 이제 한 숨 돌리려던 찰나 암에 걸렸다. 당신 한 몸 돌보기도 힘들었지만 아직 어린 늦둥이 딸을 생각해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항암을 받으면서도 매일 두 시간씩 우면산을 걸었다. 다행히 예후가 좋았다. 남겨진 유산을 어떻게 좀 불려 보겠다고 투자한 것들은 하나같이 주저앉아 버렸다. 남편의 사업체도 주인이 떠난 자리를 지켜주지 않았다. 껍데기만 남은 사업체를 정리하고 반년째 강남의 부동산에서 일을 하고 있다.


언니는 이상하리만치 내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운하다고 생각할 때 연락을 해왔다. 통화 말미가 되면, 내 고민 따위는 사치였으며 이 정도면 행복한 축에 속한다는 자위를 하곤 했다. 신세 한탄을 하는 언니를 밟고 서서 내 기분을 회복하는 것 같아 미안한 적도 여러 번.


그런데 오늘의 통화는 달랐다. 언니는 목소리 볼륨을 한껏 낮추었지만 어조는 강렬했고 날이 서 있었다.

"내가 진짜,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너무 열 받아 죽겠는데 내 얘길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윤OO, 이 OOOO. 내가 진짜 지금 뉴스 보다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가지고... 아오... *&%$#@....이 동네 사람들은 다들 수십억짜리 아파트 갖고 있는 사람들이니 나랑 상담할 때마다 이 정부 욕하느라고 혈안이 돼 있거든... 나 같은 사람은 정치색을 드러내는 순간 완전 아웃이라니까. 그런데 너, 나랑 같은 생각이긴 한 거지?"

"언니~ 전 정치 얘기하다가 이혼할 뻔했어요 ㅎㅎ. 이젠 남편하고 정부, 정치, 정치인에 대해서는 전혀 말 섞지 않으려고요. 제가 뭘 세게 주장할 만큼 잘 알지도 못하고요. 그래도 언니 얘기가 듣기 거북하지는 않네요. 하하하"

"아휴, 다행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계속해서 목소리를 죽이고 이야기하는 언니가 너무 웃겼다. 상상이 가는 그림이었다. 남들 눈을 피해 잠깐 밖으로 나왔다는 언니는 상가 밖의 후미진 뒷골목에서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겠지. 전화를 하는 내내 동공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누구 훔쳐 듣는 사람 없나를 확인할 테고 오른쪽 손으로 마스크 쓴 입을 또 가리고 이야기할 테지. 아는 사람이라도 지나간다면 하던 말을 멈추고 눈으로 최대한 따뜻한 눈웃음을 지으며 지인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는 척하겠지...

"언니, 근데 언니 지금 목소리... 마치 독립운동가가 몰래 지령을 전하는 것처럼 굉장히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거 알아요? 너무 웃겨~"

"그러니? 하하하하. 그런데 이 동네는 그래야 한다니까? 진짜 누구한테 이런 생각을 표현할 수가 없어. 어쨌든 이제는 좀 후련하다. 그나저나 우리는 언제나 만난다니? 올해는 이렇게 얼굴 한번 못 보고 지나가나 보다. "


짧지만 강렬했던 통화를 끝내고 조금은 후련해졌다. 언니에게 졌던 빚을 어느 정도 갚은 기분이랄까.

사는 거야 다 거기서 거기고 고만고만할 것이다. 언니가 가진 삶의 무게든 나의 그것이든 뭐 다르랴. 다만 의지하고 하소연할 사람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클 것이다. 서로에게 빚도 졌다가, 갚기도 했다가, 끌어안고 울기도 했다가, 토라지기도 하겠지만 그럴 상대가 있다면, 그럭저럭 살만하고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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