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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ug 20. 2021

뻔한 결말

지난 주말, 유난히 길고 험난했던 여름 방학의 끝에 <모가디슈>를 보았다.

큰 아이의 입대로 울적하게 2주, 작은 아이의 대상포진으로 정신없게 2주를 보내고 나니 여름도 끝나고 작은아이의 방학도 끝이 나버렸다. 여행은 꿈도 못 꾸고 잠깐의 외출도 두려웠지만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영화를 예매했다.

예매를 하며 지난 예매 기록을 훑어보니 지난해 2월이 마지막이었다. 마치 2020년 2월 이후 어딘가에 고립되어 있다가 처음 바깥세상으로 나온 듯한 기분, 재난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현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재난 상황이라는 게 다른 점이지만.


뻔한 영화였다.

내전으로 오도 가도 못한 상황에 놓인 남북의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이 서로에게 의지하고 합심해가며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하지만 분단국가라는 현실 앞에서 상대는 적에 불과함을 깨닫고 쓸쓸하게 헤어진다는 마무리. 적당한 긴장감과 적당한 유머, 안정적인 소재에서 오는 안정적인 감동이 있는 영화였다.


그 뻔한 영화 속, 코끝이 찡해지는 장면 하나가 있었다.

북한 대사관 식구들이 남한 대사관으로 피신을 해온 밤, 모두가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남한 대사의 부인이 잘 떼어지지 않는 깻잎 장아찌를 잡고 실랑이를 하자 북한 대사 부인이 아래쪽 깻잎을 지그시 눌러주는 장면이었다. 깻잎 장아찌를 먹어본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장면이었다.

뻔한 영화의 뻔한 자극 포인트에서 뻔하게 반응한 나였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우리나라 반찬 중에는 협동해야 먹을 수 있는 것이 많다.

잘 익은 배추김치를 칼로 먹기 좋게 썰어 내놓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꼭지만 따버리고 큼직하게 한쪽을 그대로 접시에 담아내면 그렇게 먹음직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우리집 식구들은 보쌈이나 고기를 먹을 때 곁들이는 김치라 함은 으레 그런 줄 다. 맨 위에 작은 배춧잎들이 하나 둘 사라지다 밑에 남은 넓적한 잎들을 만나면 서로 잡고 찢고 하느라 바쁘다. 한 명이 배춧잎 한쪽 끝을 잡으면 다른 한 명이 잽싸게 반대쪽 끝을 잡고 아래로 누른다. 자연스럽게 갈라지는 배추김치를 나누어 각자의 밥그릇으로 데리고 간다.


오이소박이도 마찬가지다.

열십자로 칼집을 낸 가운데에 부추로 버무린 소가 통통하게 들어있는 오이소박이. 통째로 가져가기에는 부담스럽다. 통으로 가져가 끄트머리를 한입 베어 물어 네 조각으로 나눌 수도 있겠지만 왠지 채신머리없어 보인다. 접시에서 네 쪽으로 만들어 하나만 가져가야 할 것 같은데 혼자서는 쉽지 않다. 그럴 때 또 누군가의 젓가락이 등장한다. 둘이 한쪽씩 잡아 두 동강을 내고, 쌍쌍바 가르듯 다시 가르고 나서 4분의 1쪽을 가져다 먹는다.


능력 있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반찬도 있다. 가시째 상에 오른 생선이 그것이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 중에는 꼭 생선 가시 바르기에 진심인 사람, 열정을 다하는 사람,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가족 중에는 남편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작은 아이가 전수받는 중이다. 생선을 잘 바르는 사람들은 혼자만 먹지 않는다. 가시 없는 큰 살점을 들어 내서는 누군가의 밥그릇 안에 살포시 넣어준다. 밥상에 앉은 모두에게 전해주고 나서야 자신 몫의 생선 살을 바른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은 누군가는 깻잎으로, 김치로, 오이소박이로 보답한다. 우리에겐 흔한 풍경, 뻔한 모습니다.



우리나라 음식은 이렇게 다르다. 뻔한 정을 나누느라 바쁜 음식이다.

이미 여덟 등분된 각자의 조각을 갖고 가면 끝나버리는 피자와는 비교 상대가 안된다.

뼈 사이사이를 칼로 잘라낸 후 하나씩 집어다 먹는 베이비 폭립 바비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접시에 쌈 한 장을 펼쳐놓고 이것저것 가져다가 싸 먹는 월남쌈이나 작게 뭉친 밥 위에 회를 길게 늘어뜨린 초밥 모두 정 없기는 매한가지다.

만드는 순간부터 입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정으로 똘똘 뭉친 것이 한국의 음식문화가 아닐까.


재난영화의 뻔한 전개처럼 우리도 코로나 19 재난에서 뻔한 결말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뻔한 결말을 축하하며 한국인에게만 뻔한 정을 나눌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다섯 명이건 열명이건 신경 쓰지 않고 모여 앉아 김치도 찢어주고 깻잎도 잡아주고 생선도 발라주면서 시끌벅적 밥 한 끼 하는 날이 어서 빨리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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