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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ug 27. 2021

빌런으로 남아 주오.

빌런 (Villain)
라틴어 '빌라누스(villanus)'에서 유래된 것으로, 빌라누스는 고대 로마의 농장 '빌라(villa)'에서 일하는 농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빌라누스들은 차별과 곤궁에 시달리다 결국 상인과 귀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폭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이처럼 아픈 과거들로 인해 결국 악당으로 변모하게 됐다는 점에서, 창작물 등에서는 ‘빌런’을 ‘악당’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빌런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최근엔 '무언가에 집착하는 사람, 민폐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변모한 신조어다.

이 단어가 뇌리에 박힌 것은 <백종원의 골목식당>에서였다. 도움을 주러 간 백종원과 제작진의 호의가 무색하게 고집을 부리거나 변화를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시청자들은 '빌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남편은 댓글 빌런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 글에서만 그렇다. 다른 글은 읽지 않으니 내 글에서만 댓글 빌런이 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차라리 다행이다. 다른 작가님의 글에 그런 댓글을 달았다가는 언젠가 신고당할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댓글을 달 때마다 난 그에게 톡을 보낸다.

"댓글 빌런 또 등장!"

그러면 남편은 쪼르르 전화를 걸어 자신이 왜 그런 댓글을 썼는지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시작한다.


남편의 댓글은 이런 식이다.

살찐 아내를 놀렸다는 <유머의 처음과 끝>  글에 남편은 "다음 생은 다를 거라는 거... 확실한 거죠? ㅎㅎ"라고 썼다.

가족의 의미에 대해 쓴 <가족의 힘? 가족의 힘! 가족의 힘...> 글에는 "뭘 가족을 이처럼 거창하게.... 걍 가족은... 가족 아닌가요?"라는 답을 달았다.

가장 격렬했던 댓글의 향연은 쌍둥이 배구 선수들의 학교폭력 기사에 대해 썼던 글에서였다.

남편은 장장 5개의 댓글을 달아가면서 반론을 펼쳤고 거기에 나는 대댓글을 달아주며 옆에 있는 아들에게 "너희 아빠 오늘 왜 이런다니..." 했던 기억이 난다.

그가 내 남편인 줄 몰랐던 사람들은 필시 '저 사람 왜 저래?'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만큼 그는 치열하게 반응했다.


남편이 흥분하는 주제가 몇 개 있다.

믿었다가 배신당한 정부, 과거에는 옳았던 것이 현재의 척도로 보면 그른 일이 되어 뭇매를 맞은 사건 등, 나와 얼굴 맞대고 얘기할 때도 치열하게 논쟁하는 주제들이다. 한참을 떠들고 나면 "어때, 이번에도 내가 글감을 줬지? 고맙지?"라며 마무리를 한다. 거기에서 끝낼 것이지 꼭 글에까지 따라와 댓글로 반박의 입장을 남긴다.


그래서 남편에게 고맙다.

내 생각과 주장을 비틀고 반박해 나만의 주장과 논리에 매몰되지 않도록 제동을 걸어주는 사람이다. 멍해져 가는 내 머리를 도끼로 내리쳐서 다시 정신 바짝 차리게끔 해준다. 카프카는 책 그 역할을 해준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남편이 도끼이자 책이다.  


차별과 곤궁에 시달린 아픔으로 악당이 되어버린 고대 로마 농노와 같은 사연이 남편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 밑에서는 몰랐던 세상살이의 팍팍함, 점점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경제적 조건, 20대 때 알았던 것보다 더 심각한 세상의 부조리, 믿었던 것들로부터의 배신.

거기에서 오는 상실과 통증을 나와의 소통으로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다면 기꺼이 나를 내어주려 한다. 내 귀와 마음을 내어주고 내가 얻는 것이 더 많으니 앞으로도 빌런의 등장과 횡포를 막아서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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