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무슨 남의 나라 말 듣는 거 같아."
코미디 빅리그 코너 하나가 끝나자 남편은 이 말을 남기며 안방으로 쓸쓸히 사라졌다.
개그콘서트가 종영된 이후 유일하게 남은 개그 프로그램인 코미디 빅리그를 보곤 한다. TV보다는 배꼽이 빠져라 웃고 있는 작은 아이를 보고 있는 게 더 웃기지만 말이다.
매주 같은 포맷으로 꾸려지니 지루하기도 했지만 내용의 변주가 있으니 그럭저럭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웃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남편도 그런 줄 알았다. 개콘 때부터 그만의 엄격한 기준 탓에 웬만해선 웃지않던 그다. 전유성보다 더 독한 사람. 그랬던 그가 이제는 대사가 들리지 않아 웃지 못한다고 하는 게 아닌가.
웃음의 포인트를 잘 모를 수도 있고 속사포처럼 뱉어내는 개그맨들의 대사에 귀가 따갑다고 느낄 때도 있겠지만 처음 듣는 외국어같이 느껴진다는 말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우리가 웃을 때 따라 웃지 못한다니... 이것은 마치 외국인들 틈에서 그들이 웃을 때 못 웃는 상황이랑 같지 않은가. 당최 왜 웃는지를 알 수가 없는 답답함.
남편은 주말 오후 갑자기 오른쪽 오금이 아프다며 절뚝거렸다.
점심 설거지를 하다가 깨진 반찬통에 베어 부엌 여기저기 피를 뚝뚝 흘렸다. 방에서 줌 수업 중인 아내에게 방해될까 봐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밴드를 찾아 달그락거렸다.
작년에 안면마비가 왔던 왼쪽 머리에만 흰머리가 가득 올라왔다며 씁쓸해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뭔 말인지 하나도 안 들린다고 한 것이다.
귀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익숙했던 세상의 소리가 낯설어지는 것.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처음 들어보는 소음처럼 두려운 것.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늘 봐오던 내가 내가 아닌 것.
그런 나를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
그렇다면 그것들은 극복 가능한 게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학습하면 되잖아.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면 외국어를 배우듯 모음 자음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알아가면 되지.
스스로가 낯설다면 자꾸 보면서 익숙해지면 되지...
이렇게 남의 일처럼 생각하던 나에게도 어느 날 코미디 빅리그의 개그가 "니ㅏㅇ리푸쟈도ㅔ대뤄ㅏ로야나머ㅏㅣㅓㄹ야지부러아니래어파니" 라고 들리기 시작하면 남편에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면 될 테다.
그가 여전히 모르겠다고 한다면 손잡고 어디 어학연수라도 가야겠다.
막힌 귀 더 틀어막고 안 들린다며 우울해하지 말고 말이다.
외국어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는 '동기'와 '노출'이다.
언어를 배워야 하는 절체절명의 이유를 갖고 그 언어가 반복 사용되는 환경에 놓여있는 것, 혹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환경을 설정하는 것.
그러니 서글퍼하지 말자. 다음 주부터 코빅 꼬박꼬박 챙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