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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03. 2021

인생 반전을 꿈꿀 수 없는 이유

"돈 많은 남자 만나는 게 어때서요? 나약하고 실패한 남자랑 누가 살고 싶겠습니까?"

72세 부자 할아버지와 결혼한 20대 여성이 한 말이라며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다. 믿거나 말거나, 실화이거나 허구이거나... 

이를 보고 친구 순자는 말했다.

"인생 뭐 있냐? 살아보니 그 여자가 젤 똑똑한 거 같네. 눈 질끈 감으면 뭐든지 다 누리며 살 수 있잖아. 이제 나도 좀 누리며 살려고."


순자가 요즘 자주 쓰는 말은 "인생 뭐 있냐?"다. 

주로 뭘 구입할 때 하는 말인데, 가족들 생각해서 쓸고 닦고 차리고 먹이고 산 게 몇 년인데 내가 이것 하나도 못 누리냐며 소비를 정당화하곤 했다. 그렇다고 자신을 위해 쓰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인터넷 쇼핑몰에서 만 원짜리 티셔츠 한 장을 사거나 핸드크림 하나 사고 좋아한 것이다. 식구들 다 같이 쓰면 좋을 것 같다며 한창 광고 중인 척추 의료 가전을 사거나 고가의 남편 패딩, 핫한 아이들 신발 등을 사는 데는 목돈을 시원하게 쓰면서 "인생 뭐 있냐?"라니... 



토요일 오전, 아이 학원을 데려다주며 집에 오려는데 벨소리부터 다급한 전화가 울렸다. 

원래는 수업하는 시간이라 전화도 못 받고 아이 학원도 못 데려다주는 시간인데 마침 휴강이라 모처럼 여유로운 오전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생전 주말 오전에 전화하지 않던 순자가 화면에 뜨니 뭔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유정아~ 난데... 바빠?"

"아니, 나 지금 집에 가는 중."

"혹시.... 성형외과나 피부과, 외과 아는 데 있어?"

"무슨 일이야!"

"나... 베란다 청소를 하다가 손을 좀 베었는데 피가 많이 나네? 병원을 좀 가봐야 할 정도야."

"야~~ 왜 또 가만히 안 있고 일을 했냐? 넌 진짜... 아니다. 아픈 사람한테 이런 말을 먼저 하면 안 되지. 데리러 갈게. 지금 어디야?"

"그래 줄래? 사실은, 운전하면서 병원 알아보려니 피는 뚝뚝 떨어지고 정신이 없던 차였어. 남편은 출근했고 애들은 다 학원에 가버려서..."


집으로 가던 길을 돌려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거즈와 반창고로 촘촘히 돌려 막아 지혈을 하고 바짝 치켜들고 있던 손가락이 하필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이었다. 

"만나자마자 손가락으로 욕을 하냐? 하하하"

일부러 농담을 하며 친구를 태우고 병원을 알아보았다. 일단 와서 상태를 봐야 봉합을 할지 알 수 있다는 근처 피부과로 향했다. 반쯤 넋이 나간 친구는 "짜증 나~~"를 연발하며 다친 경위를 말했다.

오래간만에 식구들 아무도 없는 오전을 만끽하며 소파에 턱 누웠는데, 지저분한 베란다가 보이더란다.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는 그녀인데 요 며칠 바빠 신경을 못썼더니 신경 안 쓴 티가 너무 나더라나? 그래서 잡초라도 뽑아볼 요량으로 나섰다가 쓸고 닦기 시작했단다. 손이 워낙 빠른 그녀는 베란다 청소를 끝내며 마지막으로 흙을 손으로 쓸어 치우는데.... 

쓰~~ 윽 하며 바닥 흙을 훔치는 사이로 갈색의 투명하고 반짝이는 것이 보임과 동시에 손에서는 이미 피가 뚝뚝뚝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십견 와서 매일 한의원 치료받는 사람이 왜 그 팔로 또 일을 하냐고... 주말엔 밥도 안 할 거라고 큰소리쳐놓고는 왜 그랬냐고!"

"사실은... 팔이 좀 나았거든... 그걸 안 들키려고 식구들 없을 때 감쪽같이 일을 좀 해놓으려고 했는데 이 사단이 난거지..."

"너는 손 치료 끝나면 정신과 상담을 좀 받아봐야 해. 나랑 상담가자. 왜 도대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지."

"맞아 맞아. 나 이거 병 맞는 거 같아."


허물없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라지만 나도 참 그렇지, 아픈 사람에게 막말을 쏟아가며 병원에 데려갔다. 손톱 가까운 부위가 깊이 파여 결국은 몇 바늘 꿰매는 봉합 시술을 했고 안에서는 비명 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렸다. 잠시 뒤 다크서클 한가득 내려온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나왔고 기어이 고생한 나에게 커피와 케이크를 사주겠다며 카페로 데려갔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에게도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타박을 들었고 몇몇 지인에게도 같은 내용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저녁 무렵, 걱정이 되어 톡을 보냈다.

"좀 어때? 마취 풀려서 엄청 아픈 거 아냐?"

"나...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너무 아파..."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잤지? 뭐 또... 일하고 그런 거 아니지?"

"ㅋㅋㅋ 나 집에 오자마자 베란다에 떨어진 피 닦느라 물청소했어."

"진짜... 못 말린다."


요즘 부쩍 "인생 뭐 있냐?"를 입버릇처럼 말하며 맛난 것도 자주 쏘고 사고 싶던 것도 막 사들이는 그녀를 보며 우리는 로또라도 된 것 아니냐며 놀려댔다. 오십견 치료를 받으면서 밥도 잘 안 한다는 그녀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그녀도 어쩌지 못한 것이 있으니 '살던 가닥'이다. 어질러지고 지저분해지는 꼴 못 보는 성미를 갖고 태어난 인생에는 몸을 계속 바지런히 놀려야 하는 가닥이 있는 것이다. 

벗어나려고 인생 운운하며 발버둥 친다 해도 당장 눈앞의 티끌이 내 마음을 어지럽히니 손이 베던 말던 일단 치우고 봐야 하는 거였다. 인생이 뭐 없는 것 같아도 각자의 신념, 가치관과 다른 삶을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인생 뭐 있냐며 당당히 72세 노인과 결혼한 20대 여성은 결국 4개월 만에 가출을 했단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노인과 결혼한 게 후회됐다거나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어쩌면 다른 남자와 결혼했어도 어떤 이유에서든 가출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인생 뭐 없다며 과감하게 선택한 일이라 해도 결국 나를 거스르지는 못하는 게 삶 아닐까... 

나에게는 내가 거스르지 못하는 가치관이 무엇일까?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삶의 신념, 가치관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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