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적으로 날 괴롭히는 지병(?) 혹은 유전병이다. 각종 검사를 해도 이유를 찾을 수 없던 엄마처럼 나 역시 원인모를 어지럼증으로 십수 년째 고생 중인데 이때는 만사 제치고 누워서 쉬어야 한다. 눕는 것도 왼쪽으로만 누웠을 때 어지럼이 덜해서 나중에는 누워있는 게 지겹고 힘들어지는 합병증에 시달린다.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대부분의 병이 그러하듯 내 어지럼증의 원인도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 잠정 결론 내렸다. 11월부터 빽빽이 들어찬 자원봉사와 개인 수업 준비, 3일에 걸쳐 진행된 학부모 학년별 전체회의 진행과 독서동아리 모임, 아들의 면회를 앞둔 김치 담그기, 교육자원봉사센터 운영진 회의, 틈틈이 반복된 작은 아이 학원 라이드, 사이사이 해결해야 하는 각종 전화 업무, 매일매일 쓰고 싶은 브런치 글쓰기...
그 와중에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시작된 뜨개질이 불을 붙였다.
처음 뜨개질과 만난 건 지난 5월이었다.
30년 지기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에서 한 친구의 제안 때문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제안은 아니었다. 그녀가 들고 나왔던 여름 가방이 너무 이쁘다며 너도나도 만들어보겠다고 호들갑을 피운 것이 시작이었다. 친구들의 등쌀에 못 이겨 재료를 준비한 그녀는 우리를 집으로 초대했고, 우리는 먹고 떠들때 손까지 함께 움직이는 행위의 맛을 알아버렸다.
카페에 여유롭게 앉아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거기에 단순 작업을 하는 손이 가세하니 이야기가 더욱 자유로워지고 깊어졌다. 말하는 사람은 맘속에 가두었던 이야기를 무심결에 툭툭 던질 수 있게 되고 듣는 이도 조금은 부담 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심각한 이야기가 나오면 잠시 잰걸음을 멈추고 상대를 쳐다보다가 다시 가던 길을 가면 그만이었다. 실컷 떠들고 났을 때 손에 '가방'같은 굵직한 생산물까지 남으니 그날의 수다는 수다 이상의 것으로 남았다.
문제는 집으로 돌아와 나 혼자가 되었을 때였다.
도무지 뜨개질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혼자 하니 재미없었고 뜨개질 초보인 나에게 한 땀 한 땀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결국, 여름을 겨냥하고 시작한 뜨개질은 11월 모임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보기에도 시원~한 여름 가방은 잘 묵혀두었다가 내년을 기약해야 했다.
11월 모임에는 겨울 가방 재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샘플은 친구의 가방.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이뿌다~~~"를 연발하며 뜨개질을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뜨개질은 그런 것이다. 따뜻한 벽난로 앞에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슬슬 실을 뜨는 것. 무릎담요를 덮고 옆에는 고양이가 나른하게 누워있어도 좋은 그림이 되겠다. 전혀 힘들지 않은 손놀림으로 여유롭게, 뜨다가 쉬다가 뜨다가 차 한잔 마시다가... 그렇게 하는 게 뜨개질 아닌가. 뜨개질을 가르쳐준 친구만 봐도, 세상 여유롭고 평화롭게, 우아하게, 아름답게 뜨개질을 했다.
나의 뜨개질은 '전투 뜨개질'이었다. 일단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세상에서 제일 촘촘하게 코를 만들었다. 바람 한점도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코 사이에 힘겹게 바늘을 들이밀고 겨우겨우 전진해가는... 전형적인 초보 뜨개질꾼. 열정이 과한 초보는 꽤나 열심히 했다. 무식하니 용감하고 기교는 없는데 기개만 있었다.
이번에는 집에 돌아와서도 열심히 떴다. 뭔가가 잘못되면 수습을 못하니 실을 풀고 처음부터 다시 떴다. 그러기를 세 번이나 해가며 겨우겨우 진도를 따라잡았다.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 낑낑거리는 아내를 본 남편은 기어이 한마디 던졌다.
"그냥... 책 보고 글 써~~ 요새 글도 안 올라오더라? 하던 대로 책이나 봐~~"
남편의 충고를 무시한 대가로 얻은 어지럼증이 3일을 갔다. 이번에는 유난히 회복이 더뎠다. 혹자는 백신 후유증이라고도 했지만 알 길이 없다. 오전에 봉사를 다녀와 오후에는 눕고, 오전에 회의를 다녀와 오후에 또 누웠다. 며칠째 브런치 글을 쉰 것이 맘에 걸렸지만 노트북을 키는 것도 버거웠다. 거실에 방치된 뜨개질이 눈에 거슬렸지만 붙잡을 수 없었다. 남편 말대로 슬슬 책이나 읽고 간간히 글이나 쓸 것이지 괜한 취미를 또 하나 만들었다 싶었는데, 어찌 보면 괜찮은 취미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아주 열정적이고 시끄럽게 고독을 즐기는 행위다. 몸은 가만히 있으되 머릿속은 쉼 없이 가동되는 공장이 된다. 그래서 때로는 극심하게 피로하다. 물론 그 피로를 마약처럼 즐기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브런치는 그런 마약쟁이들이 모여있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이사이 뜨개질을 하면 심신의 평화가 깃들지 않을까 싶다. 단순 반복 무한 노동의 세계는 무념무상의 세계로 날 이끌 것이다. 속 시끄럽게 하던 일들, 머리 복잡하게 만들던 것들을 정리하게 해 줄 것이다. 버려지고 흩어지던 시간을 잡아 온전히 내게 갖다 바치는 기분도 들지 않을까.
친구는 말했다. 뜨개질을 하는 순간만큼은 잡념이 없어진다고... 사춘기 아들로 혹독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그녀에게 어쩌면 뜨개질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아이의 방황마저도 엄마인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는 그녀에게, 뜨개질을 하는 시간만큼은 자신이 괜찮은 사람임을 일깨워주는 시간이었을지도...
그렇게, 글쓰기와 뜨개질은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처럼 보인다.
바쁜 와중에도, 어지럼증이 이따금씩 몰려오는데도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끄적여본다. 그 옆에 놓인 실과 바늘을 보는 것도 기분 좋다. 초반의 전투 뜨개질에서 그나마 조금은 진화했다. 빡빡하던 코에도 숨 쉴 틈이 생겼다. 글이 나를 깨우고 위로하고 성장시켰던 것처럼 뜨개질도 내게 삶의 또 다른 재미를 선물하는 중이다.
물론 뜨개질을 글쓰기만큼 꾸준히, 열심히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제 일주일도 안 된 초보 뜨개질꾼의 달뜬 웅성거림으로 끝나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하다 하다 뜨개질까지 하고 있다.
지난 5월 시작한 여름가방 뜨기가 11월에 끝났다. 구멍이 작아 손이 안 들어간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