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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Nov 24. 2021

조서를 쓰다.

이름! 
송. 유. 정. 이요.

큰 소리로 말해!

송! 유! 정!

주민등록번호!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해요?

지금 이게 장난인 줄 알아? 주민번호!

****** - 2****** 이요.

주소!

경기도 용인시 ~~*$%@#*!&%$*@

이제, 지난 한 해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해봐. 어디서 뭐했어?

너무하네요. 그걸 어떻게 일일이 기억해요?

당신이 어디서 뭘 했는지를 당신이 기억하지 누가 기억해?  

그건, 그렇지만....


창문도 없는 캄캄한 시멘트 방. 

조도가 낮은 백열전구 하나마저 없었다면 공포는 더 극대화됐으리라.

언제 어디서 무슨 행동을 어떻게 왜 했는지를 조사하기에 앞서 '누구'에 해당하는 나를 조사하고 있는 상대는, 

'나'였다. 


조서를 작성하다 말고 불거진 상상이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다. 


경기도 교육청에서 지난 한 해 교육자원봉사 컨설팅을 다닌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내게 줄 감사패를 준비 중인데, 근거가 될 만한 '공적조서'를 작성해달라고 했다. 범죄사실을 심문한 조서는 아니니 다행이나 공적에 대한 조서를 작성하는 것도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원래 공적조서를 본인이 직접 쓰는 건가? 너무 오글거리는데? 내가 한 해 동안 이룬 성과를 조목조목 적어 넣어야 하는 거잖아. '여러분~ 제가 이런 사람이에요~~ 저 잘했죠?'라고 말하는 기분. 내가 잘났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대놓고 나 잘났소 하는 이런 글을 쓰는 게 불편하다..."

넋두리 같은 말에 남편도 오래전 대기업에 다니던 때를 회상했다.

"아... 나도 공적조서 한참 썼지. 내가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해서 회사가 알아서 포상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걸 왜 나보고 하나하나 밝히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갔지. 뻔히 자료로 나와있는데 말이야." 


알아보니, 별도 규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적조서는 본인이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일종의 관례인가 보다. 당사자가 직접 작성한 조서를 추천인이 표창권자에게 추천을 하면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표창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 투덜거리고 본격적으로 나의 공적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상기자는 지난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용인교육자원봉사센터에서 디베이트 마을교사와 운영지원단으로 활동 중임.      

- 2019년에 디베이트 마을교사 입문과정을 개설, 진행하여 디베이트 마을교사를 양성하였음. 디베이트 마을교사팀 단장을 맡아 교육기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으며 2021년 상반기 3개교, 하반기 3개교에서 교육자원봉사를 실시함.      

- 2020년부터 2021년까지 경기도 교육청 학부모시민협력과 교육자원봉사 컨설팅 위원으로 활동하였음. 도내 25개 지원청 산하 교육자원봉사센터를 방문하여 애로사항을 전달받고 우수사례를 나누며 교육자원봉사의 체계화, 내실화, 활성화에 힘씀.      

- '용인교육자원봉사센터 마을교사 입문과정, 안성 교육자원봉사 입문과정'에서 교육자원봉사자 소양교육 강사로 활동함. 교육자원봉사의 의미와 목표, 마음가짐에 대하여 강의함. 

- 2021년 한 해 동안 6개 학교에서 128시간의 교육자원봉사를 수행함. 



2017년에도 써보았던 기억이 났다. 이천에서 했던 꿈의 학교와 관련된 활동을 적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군더더기 덜어내고 정직하게 나의 1년을 돌아보자고 생각했다.

다행히 예전보다는 쓸거리가 많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나의 2021년이 값지게 보였고 '생각보다 바빴구나?'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서 살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현대인의 강박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사는 나다. 집에서 뒹굴거리는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 크고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경제적인 성과와 연결되지 못하면 자책감은 배가 된다. 

어쩌면 교육자원봉사는 그러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시작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수입으로 연결되는 일은 아니지만 버려지던 나의 시간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시간으로 치환하는 일, 무가치한 나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승격시켜주는 일,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에 위안이 되는 일.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해가 되기보다는 득이 되는 일, 내가 가진 작은 것들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이롭게 하는 일. 

이것이 나의 2021년 공적이다. 


공적조서는 스스로 작성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추전과 표창 이전에 내가 나를 검증하고 확인하는 절차다. 

쓰다 보면 내가 표창을 받을 만 한지 아닌지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가 가능해진다. 약간은 오글거리고 얼마쯤은 쑥스럽기도 하지만 열심히 움직인 자신을 마주하면서 스스로를 안아주는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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