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싫은 건 아니었어요. PC방에 가거나 친구들이랑 노래방에 가는 것보다는 집에 있는 편이 훨씬 편하고 좋았으니까요. 신우는 복도식 아파트의 긴 복도 끝에 있는 자신의 집까지 총 네 집을 지나가야 하는 그 길이 싫었어요.
학교가 끝나고 학원까지 들러 집에 오는 시간은 늘 7시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쭉 나 있는 복도를 따라가노라면 어느 집에서 뭘 해 먹는지 온갖 냄새를 맡으며 가야 했지요. 게다가 복도 쪽으로 주방 창문이 나 있어서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어느 집에서 누가 무엇을 먹는지도 볼 수 있었어요.
보글보글 찌개가 끓고 있는 뚝배기를 가운데 두고 가족들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 신우는 심술이 났어요. 창문이 닫혀있는 다음 집을 지나면 마음이 풀렸다가, 엄마가 아이의 숟가락에 반찬을 놓아주는 그다음 집을 보면 '쳇! 쟤는 손이 없나? 뭘 먹여주고 난리야?' 하며 심사가 뒤틀렸지요.
그렇게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신우네 집이 나왔어요. 살짝 열려있는 부엌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늘 같은 풍경이 보였어요. 식탁 등만 켜진 부엌, 거실에서 희미하게 깜빡이는 TV 불빛,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꾸벅꾸벅 조는 할머니.
"다녀왔습니다~" 하며 들어서면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어요.
"아이고. 이제 오셨나? 배고프지? 할머니가 들깨 넣고 된장 지져놨어. 얼른 밥 먹어라~ 형우는 아까 먹고 제방에서 숙제한다."
'또 그놈의 된장. 지겹지도 않나?' 신우는 속으로 투덜거렸어요.
"할머니. 저 치킨 시켜 먹을래요."
신우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상에 올라오는 된장찌개는 거들떠도 안 보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무심하게 닫힌 문을 보며 할머니는 차려두었던 상을 조용히 정리하고 배달 온 치킨을 신우에게 건넸지요. 신우가 치킨을 먹는 모습을 본 할머니는 한참을 더 TV 앞에서 졸았어요. 그러다가 아빠가 퇴근하면 그제야 짐을 챙기고 길을 나서며 문밖에서 말했어요.
"신우야. 할머니 간다~ 내일 또 올게~"
신우와 신우 동생 형우가 어렸을 때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했어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죠. 하지만 이후로도 엄마는 자주 봤어요. 가끔은 신우, 형우가 사는 집에 놀러 오기도 했지요. 그럴 때는 신우네도 다른 가족들처럼 같이 밥도 먹고 TV도 보면서 지냈어요. 하지만 곧 엄마는 돌아갔고 다시 아빠와 신우, 형우만 남겨졌지요. 바쁜 아빠 때문에 대부분의 날들은 할머니와 함께였어요. 유치원에 손잡고 가준 사람, 수영 강습 때 보호자 대기실에서 신우를 지켜본 사람, 학부모 참관일에 교실 뒤편에 서있던 사람, 아플 때 병원 데려가 준 사람. 모두가 할머니였지요. 매일 저녁을 차려준 것도 할머니였어요.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할머니는 가까운 곳에 사시면서 아이들을 돌보았어요.
어린 나이에 엄마와 이별한 손주들이 안쓰러웠던 할머니는 그저 밥 한 끼에 정성을 쏟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나마 그거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지요.
할머니는, 자신은 먹지도 않으면서 백화점에서 비싼 소고기를 사다가 신우와 형우를 위해 구웠어요. 꽈리고추 넣어 국물 자작자작하게 볶아낸 멸치, 방금 무쳐 신선한 겉절이, 들기름 바르고 소금 뿌려 정성스레 구운 김을 차려줬어요. 다시 멸치를 폭폭 끓인 물에 신김치와 된장을 풀어넣어 푹 끓인 다음 마지막에 들깨가루를 넣어 끓인 찌개도 상에 올렸지요. 어리고 딱한 손주들을 위해서라며 최고로 좋은 것만 사다가 먹이고 입혔어요.
신우와 형우가 어렸을 때는 애교도 많고 살가웠지요. 할머니 찌개와 반찬도 참 좋아했어요. 그런데 요 녀석들이 초등학교 5, 6학년이 되자 할머니가 해주는 밥도 안 먹으려 하고 툭하면 방문 닫고 들어가 게임만 했어요. 아이들이 손도 대지 않은 다 식은 찌개를 할머니는 용기에 담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 다음날 끓여 먹었어요. 아이들에게는 다음 날 새 찌개를 끓여줬지요. 그런 날의 반복, 연속이었어요.
...
신우가 중학생이 되던 해, 신우 아빠는 캐나다로 발령이 났고 신우네 세 식구는 캐나다로 떠나게 됐어요. 아들과 두 손자 모두를 먼 이국으로 보내야 했던 할머니의 허전함, 그것을 알리 없던 신우와 형우는 마냥 들떠 있었어요. 아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엄마처럼 키워준 할머니였지만 캐나다까지 따라갈 수는 없었어요. 친구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노후를 보낼 수는 없었지요.
출국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신우네 세 식구는 오래간만에 할머니와 저녁을 먹기로 했지요.
"신우야~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너 좋아하는 치킨 시켜줄까? 캐나다 가면 못 먹을 텐데?"
하지만 신우는 치킨보다 먹고 싶은 음식이 따로 있었어요.
"할머니. 나 그거 먹고 싶어요. 할머니가 끓여 준 들깨 된장찌개."
"들깨 된장찌개? 에이... 더 맛있는 거 먹지 맨날 먹던 걸 뭐하러?"
"갑자기 그게 먹고 싶어요. 끓여줄 수 있어요?"
"그럼~ 멸치가 읎냐, 된장이 읎냐?"
할머니는 금세 들깨 된장찌개를 끓였어요. 신우는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호호 불어 입에 떠 넣었어요. 얼마만에 먹는 할머니 맛인지, 왜 이 맛있는 걸 한동안 거부했는지 제 자신이 이해가 안 됐지요. 아빠와 형우, 할머니도 된장찌개를 밥에 쓱쓱 비벼 맛있게 먹었어요.
밥을 먹던 신우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아! 깜짝이야! 밥 먹다 말고 갑자기 왜 일어서?"
아빠가 놀라며 말했어요.
"잠깐만요. 잠깐만! 갑자기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보고 싶은 거? 그게 뭔데?"
신우는 현관 밖으로 뛰어 나가 복도 밖 창문으로 부엌을 들여다봤어요.
창문 안에는, 따뜻한 조명과 그 아래 자리 잡은 식탁,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가족들과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가 담겨 있었어요.
신우는 더없이 행복했어요. 자신이 매일 복도를 걸으며 봤던 행복했던 가족의 모습이 신우네 집에도 있었다는 걸 그제야 발견한 거예요.
신우는 자신의 집에는 엄마가 없어서 다른 집이 누리는 행복을 못 누린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끓인 게 아닌 할머니표 된장찌개가 그렇게 싫었던 거였죠. 가족들이 둘러앉아 엄마가 끓여준 찌개를 먹으며 하하호호 웃음꽃을 피우는 장면만 화목한 가정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됐어요. 신우는 지금까지 어느 한순간도 사랑받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신우네 가족은 불행하지 않았어요. 늘 정성을 다하던 할머니가 있었으니까요.
* 매거진의 이전 글, 로운 작가님의 < 라면만 끓일 수 있다면 '보글보글 닭볶음탕'>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