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밥은 제때 먹어야 한다는 아버지 말씀처럼, 정해진 시간에 아침 점심을 먹거나 아침 거르게 되면 점심만 먹어야지 브런치가 웬 말인가 싶었지. 게다가 빵 쪼가리에 대충 익힌 계란과 풀때기 몇 포기와 커피라니. 그건 그냥... 간식이라고 해야 옳지 않니? 아무튼, 브런치를 먹고 집에 돌아오면 난 어김없이 라면과 함께 총각김치 와그작 씹어 먹어야 속이 진정이 됐단다.
그러다가 어떤 날, 완전 다른 브런치, 너를 만났지.
너라는 브런치는 정체를 알 수 없었어. 나를 작가님이라고 '추앙'하더니 글을 쓰래. 그냥 쓰래. 내 안의 감성을 일깨워 글을 쓰고 다른 사람들에게 막 보여주라는 거야. 어떤 날엔 또 쓴 글을 공모전에 내보래. 계속 엉덩이를 두들기며 잘한다고 칭찬하고 할 수 있다고 엄지척을 날리더라? 나를 한껏 들뜨게 만들었지. 그러더니 감성 가득한 글보다는 전문분야가 돋보이는 글에 상을 주대? 이내 시무룩해지면 또 찾아와서 막 쓰래. 작가님을 안 본 지 오래됐다며 쓰라고 하고 가끔 포털 사이트에 올려주면서 흥을 돋우기도 하더라. 그러면 단순한 나는 신이 나서 또 쓰게 되는 거지. 그러다 보니 너에게 중독이 되어버렸다.
What day / Which day
처음으로 조회수가 폭발하던 어떤 날. 그 어리둥절함을 잊지 못한다.
좋아요, 댓글, 구독자수가 주체할 수 없게 올라가는 경험을 브런치 네가 아니면 누가 주었겠니. 너의 장난질에 놀아나는 것임을 알았지만 뭐 어때. 서로 손해 볼 거 없는데. 좋아요 누른다고 내 글을 다 읽어준 것은 아니라는 것, 나와 교감을 나눈다고 해서 내 글이 반드시 훌륭한 건 아니라는 걸 나도 알지. 구독자 중에는 허수가 더 많다는 것도 알아. 나 그렇게 순진한 애는 아니거든. 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거야. 왜냐고? 그래도 기분 좋으니까. 그 발칙한 장난질이 참 맘에 들었어.
함께 글 쓰며 놀아보자는 이들이 생긴 어떤 날. 그 신기함을 기억해.
얼굴도 본 적 없고 목소리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과 글을 쓰며 놀다니 말이야. 생각해 봐. 혼자 창밖을 보면서 브런치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서너 명이 옆에 와서 "같이 먹을래요?"라고 하면 선뜻 응할 수 있겠어? 게다가 남자들도 섞여있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지겠지. '어떡하지? 어떻게 거절하지? 그냥 나가버릴까? 남자들이랑 같이 커피 마시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지?' 오만가지 걱정이 달라붙겠지. 하지만 너라는 브런치를 함께 먹는 상황은 달랐지. 성별, 나이, 지역 불문하고 그냥 쓰는 거야. 주제 하나 던져주면 막 달려들어서 써. 그냥 막 써. 쓰고 좋대. 재밌대.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서로의 얼굴을 몰라. 목소리도 몰라. 그런데 또 모여서 다음에 뭘 쓸지 고민해.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내 아이가 그런다고 생각해 봤어.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랑 그렇게 어울려 논다고 하면 얼마나 걱정스럽겠니. 만약에 대면으로 만난다고 하면 미쳤냐고 할걸? 그 사람 뭘 믿고 대화하고 만나냐며 말이야. 그런데 브런치 너와 함께면... 그게 다 이해되더라.
브런치에 미쳐 놀다가 실수하고 상처 줬던 어떤 날도 기억나. 잊을 수 없지.
서로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한 자유로운 글쓰기가 브런치 너의 매력이라고 노래하면서 타인의 글쓰기를 침범했던 일이 있었지. 아직도 브런치 어딘가에 내 사과문이 날아다니고 있으니 너도 알 거야. 누군가는 그러더라. 이제 그 글을 내려도 되지 않느냐고.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그건 내게 보내는 주기적인 경고문이야. < 이곳에 차를 대지 마시오 > < 개조심 >처럼 담벼락에 빨간색 락카로 선명하게 써놓은 것 같은 경고문. 내 몸이 아니라 브런치 네 몸에 새긴 디지털 문신 같은 거야. 내가 자유롭고자 한다면 상대의 자유도 인정하라는 뼈아픈 가르침이지. 너도 잊지 마.
그것 말고도 떠오르는 어떤 날이 참 많지만...
Some day
아직 생각해본 적 없겠지만 너를 떠나는 어떤 날도 오겠지.
"재미있게 실컷 놀다가 재미없어지면 나와~"
위에 언급한 어떤 날, 힘들어하는 나에게 남편이 말했어. "당장 그만둬! 브런치 그게 뭐라고 그렇게 힘들어하면서까지 있어?"라고 하지 않고 재미없어지면 나오라고 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알았던 거지. 아직 내가 브런치 너와 노는 걸 얼마나 재미있어하는지 말이야.
브런치 고인물이 되기로, 브런치 네가 제발 나가 달라고 사정하는 날이 와도 나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거야 모를 일이지. 너랑 노는 게 재미없어지고 글쓰기가 지루해지는 어떤 날이 오면 홀연히 나갈 거야. 아마, 작별인사도 없이 나갈걸?
아! 그런 어떤 날이 올 수도 있겠다.
나는 널 떠날 준비가 안 됐는데 네가 먼저 떠난다고 할 날. 싸이월드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잊히고 버려지는 날이 올지 모르잖아. 하지만 걱정 마. 너를 위해 행동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줄게. 다음카카오 본사 정문 앞에 드러누울게. 널 그냥 사라지게 두지는 않을 거야.
너와 나 사이에는 수많은 어떤 날이 존재하지. 브런치와 함께 한 이후로 특별하지 않은 어떤 날이 있었을까? 매일매일 글감을 찾아 헤매느라 삶을 샅샅이 뒤졌으니 말이야. 사진첩을 들추며 먼 과거까지 들쑤셨지. 그러고 보면 어느 하루라도 글이 되지 않는 날이 있을까. 모든 날, 모든 순간을 기억할 수 있다면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