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는 마을은 조용합니다. 큰 대로에서 쑥 들어온 동네라 자동차 소음도 없고 공장지대도 아니며 유흥시설도 없습니다. 이런 곳을 베드타운이라고 부르죠. 아침이면 직장인들은 빠져나가고 아이들과 주부들만 남아 고요합니다. 저 멀리 숲 속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도 조용합니다. 크게 싸우지를 않죠. 문 닫고 조용히 삽니다. 친한 이웃과만 조심스러운 교류를 할 뿐입니다. 사람들의 드나듦이 잦은 마을입니다. 그러니 마을의 발전을 위해 마을 주민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연대, 공동체라는 말이 낯선 동네입니다.
동네 이름이 붙은 지하철역이 있지만 걸어서 30분이 걸리고 마을버스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냥 살았어요. 동네에 도움이 될 만한 시설도 없고 집값이 오를만한 그 무엇도 없지만 사람들은 만족했어요. 조용해서 살기 참 좋은 동네라며 만족했지요. 삼삼오오 모여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개선을 위해 앞에 나서는 것은 주저했지요.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마을 어귀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한 달 전이었습니다. 동네 어귀 빈터에 포클레인을 비롯한 중장비들이 총출동하더니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어요. '지식산업센터'라는 간판을 달고 시작된 공사에 사람들은 그저 무슨 회사가 들어오나 보다 했죠.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에 그곳이 실은 지식산업센터가 아닌 '데이터센터'라더군요. 이름도 생소한 그것을 사람들은 알아보기 시작했고, 곧 당혹스러워졌어요. 서버 컴퓨터와 네트워크 회선 등을 제공하는 건물이나 시설을 말하는 '데이터센터'는 최근 수도권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했다더군요.
유해성이 완벽히 검증되었거나 학교 앞 위험시설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축구장 14배 크기, 국내 최대 규모의 데이터 센터라는 설명 자체가 위협적으로 느껴졌지요. 네이버에서 운영 중인 데이터센터는 주거지역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는데, 왜 우리 동네는 주거시설 코앞에 지어지는지 도통 납득이 되지 않았어요. 게다가 그 큰 시설이 들어오는데 주민들이 아무도 몰랐다는 게 황당했죠.
비슷한 시기, 학교와 아파트가 모여있는 집 앞에 물류센터가 들어온다고 하더군요. 샛별 배송으로 유명한 업체의 물류센터가 말이죠. 주변에 초등학교가 3개나 있고 수천 세대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앞에 24시간 트럭이 드나드는 시설이 들어온다는 게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고속도로 옆 허허벌판에 물류창고들이 모여있는 건 봤지만 주택가 한가운데 샛별 배송 업체 물류센터가 들어오는 건 꽤 불편한 상황이었어요.
주민들은 불안했고 불만스러웠으며 누군가 충분히 설명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적법했는지, 주민들에게 어떤 긍정, 부정의 영향이 있는지를 말이죠. 외부에서 보면 "NIMBY(Not in my back yard, 공공의 이익에는 부합하지만 자신이 속한 지역에는 이롭지 아니한 일을 반대하는 행동)"현상이라고 손가락질받겠지만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뒷마당이 아닌 앞마당에 기피시설을 설치하는 꼴이라 가만히 있기는 힘들더라고요. 기업의 시설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도 모르겠고요. 납득할만한 설명 내지 공청회를 요청하는 주민들에게 시는 '사업설명회'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마련했지만 충분치 않았습니다. 이미 사업은 시작했고 적법했으며 주민들의 반대에는 적절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죠.
성난 주민들은 조금씩 단결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는 데 있어 공동의 목표만큼 절실한 건 없으니까요.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와 각 학교 학부모회, 지역 주민 카페 대표로 구성된 죽전 시민연대가 출범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생각을 모았습니다.
하나 된 주민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은 결국 물류센터 입주 예정이던 기업이 계약을 해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지가 곧 이윤이 되는 기업 입장에서는 샛별 배송 고객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선거를 앞두고 주민들의 여론에 기민한 각 당의 지방선거 후보자들은 이례적으로 한자리에 모여 공동합의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마을이 가진 문제점을 엄중하게 직시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힘을 모으겠다는 다짐이었죠. 한 표라도 끌어모으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겁니다.
공동합의서에 서명했다고 해서 문제가 바로 해결될 리는 없습니다. 선거가 끝나면 지난한 싸움에 시민들만 덩그러니 남겨질지도 모르죠. 시와 건물주는 물류센터로 허가된 곳이라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며 다른 업체가 들어올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겼습니다. 데이터센터의 경우는 더 답답한 실정이죠. 그럼에도 조용한 마을이 들끓기 시작했다는 것은 고무적입니다.
저는...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17년째 살고 있는 마을의 시급한 현안을 좌시할 수는 없지만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려 나서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필요했죠. 마을 사람들의 주장이 옳다는 확신, 마을의 일원으로서 나서도 된다는 확신요.
토론 수업을 준비할 때처럼 찬반 쟁점을 정리해보고 그에 따른 근거를 찾아보았습니다. 물류센터와 데이터센터에 무조건 반대하는 주민의 입장으로 기울려는 마음을 부여잡고 조금은 떨어져 사안을 살펴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든 갈등이 그러하듯 찬반의 논거들은 탄탄하며 대립 지점은 팽팽해 보였습니다만, 결국 저는 마을에 사는 사람으로서 반대편에 서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행동하기로 했지요. 비대위에 들어가기로 한 것입니다.
"나, 비대위에 들어가야겠어."라는 저의 선언에 남편이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필요하면 해야겠지만... 왜 굳이?"
앞에 선 이들을 따라가면 그만이지 뭘 앞에 나서기까지 하냐는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데이터센터와 물류센터를 무조건 반대할 논리가 부족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 동네에 사는 사람으로서 무임승차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 두 시설이 무효화된다고 해도 마음껏 자축할 수 없을 것 같고, 두 시설의 존치가 결정된다고 해도 마음껏 화내거나 속상해할 수 없을 것 같아.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비대위에 들어가는 조건은 입주자 대표이거나 학부모회 대표여야 했는데, 저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작은 아이 학교의 학부모회 임원들과 운영위원회 위원들의 미온적 태도로 합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교 바로 앞의 일도 아니잖아요."
"저희 아파트 앞이 아니라서요."
라는 말로 인해 저를 비롯한 몇몇의 의견은 간단히 외면당했습니다.
마을 주민 사이에서도 의견 및 입장은 다양했습니다.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의견, 물류센터와 데이터센터 들어오는 게 무슨 대수로운 문제냐는 의견, 오히려 동네에 좋은 것 아니냐는 의견 등 반대하거나 나서지 않는 이유도 다양했지요.
< Above Line >의 저자인 Urban Meyer는 '10-80-10 원칙'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조직이나 사회든, 모든 것을 던져 조직의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10%와, 일단은 자신의 삶에만 충실한 80%, 언제까지나 무관심한 10% 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죠.
이 원칙이 맞다면, 80%에 달하는 대중의 무관심과 부동의 자세가 이해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면 관심이 없습니다. 무심히 관망하다가 조직의 문제가 자신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때 입지를 정합니다. 앞장서는 10%에 합류할 것인지, 무관심하거나 부정하는 10%에 합류할 것인지 말이죠.
80%에게 왜 우리 마을의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느냐, 왜 불의를 외면하느냐, 왜 행동하지 않느냐며 비난하기 힘듭니다. 그들에게는 문제의식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민의식을 갖고 자발적인 참여를 한다는 것은,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가르침, 강요, 꾸짖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대신 스스로 고민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는 것이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이 아닐까 합니다. 확신을 가진 10%의 강압적인 이끔보다는, 여전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끊임없이 고민을 하며 상대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과의 대화가 마음에 더 큰 파동을 일으킨다고 믿습니다. 너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 될 때, 우리의 질문에 너희는 정해진 답을 말하라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에 우리가 답을 찾아보자고 할 때, 조직과 사회는 역동적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닐까요? 전후 맥락 파악 없이 앞에서 이끄니 그냥 따라가거나, 무조건 반대하고 보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선택을 하는 거죠.
여러분은 10-80-10 중 어디에 속하시나요?
80%에 해당한다면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어떻게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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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마을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NIMBY가 맞습니다만, 기업의 효율성을 위해 점점 주거지로 파고들고 있는 물류센터와 데이터센터의 문제는 비단 우리 마을로 끝날 문제가 아니더군요. 대한민국의 어느 마을에서 또 같은 일이 반복될지 모를 일입니다. 저 동네에도 만들었는데 이 동네에는 왜 못 만드냐는 기업의 생각이 만연화될까봐 걱정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판단은, 각자의 몫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