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주 보글보글 글놀이
가정의 달 특집
"가족"
"송상병! 그것밖에 못하나?"
"송상병! 똑바로 허자~~~"
갑자기 웬 송상병이냐고요?
'송상병'은, 자칭인 듯 자칭 아닌 자칭 같은 별명입니다.
남편이 제게 하는 말들 중 상당 부분이 앞머리에 "송상병"이라는 말을 빼고 말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던 순간, "내가 송상병이야? 당신은 이병장이고?"라며 던진 농담에서 시작됐죠.
"(송상병!) 큰아들이 왜 이리 늦지?"
"(송상병!) 시험기간인데 저렇게 놀아도 돼?"
"(송상병!) 그 성적으로 대학이 가능해? 다른 학원 알아봐야 하는 것 아냐?"
"(송상병!) 큰아들 방이 너무 더러운데?"
"(송상병!) 이 고기 너무 찔긴데?"
"(송상병!) 양말이 없어!"
저에게 쏟아내는 남편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군기가 들고 눈치가 보여 바로 시정에 들어갑니다. 늦게 들어오는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소재와 귀가시간을 파악해 보고합니다.
"(이병장님!) 오는 중이래..."
여타의 상황에 대해서도 저는 매번 해명 또는 변명을 합니다.
"(이병장님!) 공부 많이 하고 잠깐 쉬는 걸 거야."
"(이병장님!) 이 학원에서도 열심히 해주고 있어. 다른 학원이라고 별 수 있나?"
"(이병장님!) 내일 방청소 좀 해줘야겠네..."
"(이병장님!) 질겨? 많이 질겨? 싼 고기라서 그런가?"
"(이병장님!) 아이쿠 내 정신 좀 봐. 빨아놓고 널지를 않았네. 새 양말 신어."
이병장님은 상명하복을 강요하거나 얼차려를 하는 분은 아니니 그나마 견딜만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병장님, 정작 아이들에게는 한마디도 못하시지 말입니다.
"아이구~~ 우리 아들 왔어~~~? 힘들지?"
"아이구~~ 우리 아들, 시험기간이라 힘들지?"
"아이구~~ 우리 애기~~~ 아빠가 방 좀 치워줄까?"
멋진 아빠, 친구 같은 아빠, 얘기 잘 통하는 아빠로 남고 싶다고 대놓고 말하는 이병장님. 아이들에게 시험이나 성적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아이들이 관심 가질만한 이야기만 나눕니다. 어떤 때는 너무 얄밉고 비겁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송상병에게 생활관의 모든 일을 떠맡기고 당신은 이등병들의 신임만 얻겠다는 그 심보가 괘씸했지요.
하지만 그래 줘서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빠가 어렵고 말이 안 통해서, 혹은 무서워서 멀리하고 대면대면한 부자간이 얼마나 많던가... 아빠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고 즐거운 일이 되도록 했으니 감사한 일이지요. 게다가, 엄마라는 존재는 아무리 미워도 용서할 수밖에 없고 나약하고 짠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엄마인 제가 모든 총대를 메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각종 잔소리며 핀잔, 꾸중을 전담하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지는 아니지요. 모든 악녀스러운 행동을 해도 "밥 먹어~~~" 한마디면 스멀스멀 방에서 기어 나와 노골노골 풀어지는 게 아이들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송상병은 취사병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면 우리 가족의 계급도는 군대의 그것과 이상하게 다릅니다.
이등병들이 최상위 계급입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병장과 송상병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요. 이병장과 송상병은 수직적 관계 같아 보이지만 실은 수평적 관계입니다. 아니 사실은 송상병이 살짝 이병장의 위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이병장은 송상병에게 지시를 내리기 전 송상병의 눈치를 엄청 봅니다. 송상병의 설거지 소리가 거칠어지면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죠. 분위기 파악 못하고 한마디 했다가 "그래서 뭐!"라는 송상병의 날카로운 하극상이라도 당할라치면 이병장은 한없이 쪼그라듭니다. 이병들 눈치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퇴근길, 생활관 앞에서 서성이지만 이병들은 벌떡 일어나 "이병 O! O! O!" 하며 거수경례하지 않습니다. "오셨슈~~"하며 씩 웃고 말지요. 방문이 영영 닫히기라도 할까 봐 꼰대스러운 말은 꿀꺽 삼키는 이병장. 답답한 마음을 송상병에게 털어놓지만 송상병 그 녀석, 호락호락한 놈이 아닙니다.
송상병인 저는 이병장과 이등병들의 눈치를 모두 다 봅니다.
딱히 제가 잘못하진 않았지만, 이등병들과 관련된 일에는 이병장님 앞에서 늘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지요. 이병장님이 이등병들을 직접 혼내거나 싫은 소리를 하면 그건 또 듣기 싫고 꼴 보기 싫습니다. 그래서 그냥 제가 앞에 나서서 쉴드를 쳐주죠.
세계평화를 지키는 것보다 더 의미 있고 값진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군장을 메는 송. 상. 병.
제대를 240여 일 남긴 큰아들은, 전문하사로 남아 더 복무하는 게 어떻겠냐는 장교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제대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즐거움, 행복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겠죠. 끝이 분명히 있다는 것, 전역을 한다는 것은 군인들에게 간절한 희망이 분명합니다.
군대와 달리 가정에는 전역이 없습니다.
싫건 좋건 내 생이 끝나는 날까지 복무해야 하죠. 군대처럼 수직적인 조직문화라면 숨 막혀서 버티기 힘들 겁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기본적인 수칙에 충실한 가정,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가정.
그런 분위기에서라면 전역이 없더라도 살만하지 말입니다~
<2019년에 발행했던 글을 대폭 수정, 보완해 올립니다.>
* 매거진의 이전 글, 김장훈 작가님의 < 가족. 굴레인가 울타리인가 아니면... >
* 매거진의 이전 글, 청산 작가님의 < 엄마가 우는 건 괜찮았는데 >
* 매거진의 이전 글, 로운 작가님의 < "부부는 선택이지만, 자식은 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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