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글놀이 , OO 사용 설명서(인물 편)
"첫 번째 여자다운 걸 요구하지 마세요.
술은 절대 세잔 이상 먹이면 안 되구요. 아무나 패거든요.
그리고 카페 가면 콜라나 주스 마시지 말고, 커피 드세요.
가끔 때리면 안 아파도 아픈 척하거나 아파도 안 아픈 척하는 거 좋아해요.
만난 지 100일 되면, 강의실 찾아가서, 장미꽃 한 송이 내밀어보세요.
되게 좋아할 거예요.
검도하고 스쿼시는 꼭 배우세요.
가끔 유치장을 가는 것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하고요.
가끔 죽인다고 협박하면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야 편해요.
그리고 가끔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신발도 바꿔 신어 주세요.
마지막으로 글 쓰는 거 좋아하거든요.
칭찬 많이 해주세요."
"I believe~~"로 시작하는 신승훈의 노래에 자동 소환되는 차태현의 목소리.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차태현이 다른 남자에게 전하는 '그녀'에 대한 설명입니다. '엽기적인 그녀 사용설명서'랄까요?
21년 전 영화까지 소환한 이유는, 제가 사는 용인에도 엽기적인 그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저를 포함해 무려 다섯 명이나요.
지금부터 엽기적인 그녀들 사용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BGM, 깔아주셔요~ I believe~~
첫 번째.
디베이트 수업 봉사를 신청하시려면 교육자원봉사센터로 연락하시면 되고요, 봉사 말고 정식으로 수업을 의뢰하고 싶으시다면 일단 송유정에게만 은밀하게 접선하세요. 송유정을 제외한 네 명의 그녀들에게는 비밀로 하세요. 일거리 들어오는 걸 극도로 꺼려하거든요. 이상하죠? 수당이 지급되는 수업이 들어와도 그리 반가워하지 않아요. 지금 하고 있는 수업과 봉사에 집중해야 하는데 왜 자꾸 새로운 수업을 물어오냐고 따져요. '이러다가 봉사는 뒷전이 되는 거 아니냐, 교자봉이라는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며 송유정에게 따질 때도 있어요. 그런 모습을 목격하더라도 겁먹지 마세요. 이내, "그래서... 언제, 어느 학교, 몇 학년인데요?"라고 물어보거든요.
두 번째.
옆에 앉아 있다 보면 다섯 명의 대화가 싸우는 것처럼 들릴 거예요. 겁먹지 마세요. 그냥 대화예요, 대화. 다섯 명이 각자 자기주장을 펼치고 서로에게 질문하고 반박하는 과정일 뿐이에요. 언성이 점점 높아지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는데, 그냥 목소리가 큰 거예요. 수업하는 사람들이라 목청이 좋아요. 게다가 디베이트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라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게 생활화되어서 그래요. 비판적 사고랄까...
중간에 힘들어도 자리를 뜨지 마세요. 끝까지 들어 보면 '대화와 타협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실 거예요. 그렇게 지지고 볶고 해도 자기들 스스로를 '독수리 오형제'라느니, '다섯 개의 보석'이라느니, '걸그룹'이라느니 하면서 결국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헤어지거든요.
세 번째.
여전히, 다섯 명의 그녀들에게 교육자원봉사를 신청해야 할지 말지 고민되신다고요? 언제 교육자원봉사를 그만둘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걸 들으셨군요...
"대체 내가 여기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내년에는 도저히 못할 것 같아요."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면 찾지 말아요!"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한쪽 발만 걸치고 있는 거예요."
이런 얘기를 들으면 덜컥 겁이 나실지도 모르지만, 안심하세요. 당장 올해는 안 떠날 사람들이에요. 책임감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녀들'이거든요. 타지로 이사 갔지만 봉사하러 새벽같이 용인으로 오는 사람, 차사고가 났는데도 수업하러 오는 사람도 있어요. 한 번도 수업에 늦은 적도 없고 펑크 낸 적도 없답니다. 사실, 내년에는 떠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올해는 안심하셔도 돼요. 언제든 나가려고 밖에 걸치고 있는 한쪽 발을 제외하면 온몸과 마음을 교자봉에 쏟고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네 번째.
내년에 수업을 신청하고 싶으시다고요?
그건, 장담 못 드려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모두 늘 도망갈 궁리만 하거든요.
그런데... 혹시 모르니 연락은 한번 주셔요.
"내년엔 **** 에 관한 주제로 수업하면 어떨까요?"
"내년엔 OO주제는 버려야겠어요. 애들이 재미없어하네요."
"오늘 수업에서 애들이 얼마나 잘하던지... 진짜 재미있었어요~ 다음엔 요렇게 저렇게 해봐야겠어요~"
이런 대화만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우리 팀도 스터디만 하지 말자, 브런치도 먹고 수다도 좀 떨자고 투덜대 놓고는 "그래서, 이번 6학년 수업은 무슨 주제로 들어갈 거예요? 그거부터 정해야 마음이 편해요~"라는...
봉사밖에 모르는 그녀들, 디베이트밖에 모르는 그녀들입니다.
저를 비롯해 교육자원봉사센터에서 디베이트 봉사를 하는 다섯 명의 엽기적인 그녀들.
까다로워 보이지만 설명서를 잘 읽어보시면, 꽤 괜찮습니다~
* 올해 초 몇 달에 걸쳐 운영진들과 함께 만든 교육자원봉사 매뉴얼입니다. 진짜 사용설명서지요.
* 매거진의 이전 글, 김장훈 작가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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