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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n 22. 2022

커피는 나눠 마시기 싫은데...

6월 2주 보글보글 글놀이
"커피"

"딱 한 모금만!"

엄마는 늘 그런식이었다. 속이 훌쳐서 한 잔 다 먹기는 힘들지만 커피 향 때문에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꼭, 내 몫의 커피 한 모금만을 원했다. 믹스커피 한봉이 얼마나 된다고... 종이컵 반잔을 웃도는, 쥐 오줌만큼 밖에 안 되는 양에서 한 모금이면 3분의 1인데, 그걸 달라고 했다.

"한잔 타서 한 입 마시고 남은 건 나중에 드셔~"라고 하면, 그건 또 싫단다. 믹스커피는 식으면 맛없다나...


믹스커피는 자주 마시지도 않으면서 마트 행사 때 250개들이 몇 박스를 쟁여놓는 엄마다.

믹스커피를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사면서 꼭 엄마 몫을 남겨놓는데, 그걸 스무 개 정도씩 지퍼백에 나누어 여기저기 숨겨둬야 한단다.

"믹스커피 있어요? 갑자기 믹스커피 먹고 싶네? 우리 집에는 없어서."

친정에 갔다가 문득 믹스커피가 먹고 싶어 물으면 엄마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안방 장롱 어딘가에서 하나를 꺼내온다.

"믹스커피가 왜 거기서 나와요?"

"눈에 보이면 자꾸 먹을까 봐. 몸에도 안 좋다고 하고 먹으면 속이 니글거리는데 가끔 딱 한 모금만 먹고 싶을 때가 있거든. 그러니 안 살 수는 없고, 대신 손쉽게 꺼내먹지 못하는 곳으로 숨겨둔 거야. 나 자신이 잘 못 찾게 숨겨둔 거지. 하나 타서 나눠마실래? 나도 한 모금 먹고 싶다."


엄마의 커피사랑은 오래됐다.

아메리카노가 대중화되기 훨씬 전부터 엄마는 블랙을 즐겼다. 90년대 초반쯤, 미국에 사는 고모, 작은아버지 가족들이 한국에 올 때 캐리어 가득 가져온 원두가 시작이었을 것이다. 미국 친척집을 방문했다가 구입해 온 커피머신을 도란스(변압기)에 꽂아 아침 일찍 유리 주전자 가득 내렸다. 커피 향이 온 집안을 채우면 "커피에 빵 한쪽 먹는 게 제일 좋아~ 음~ 커피 냄새~"하며 행복해했다. 누가 들으면 하루에 수십 잔 먹는 줄 알았겠지만 종일 마시는 양은 한 잔이 채 안되었다. 몇 모금 마시다가 티슈로 덮어놓고 "이따가 마셔야지~"하곤 했다.


딸네 집에서 처음 캡슐커피 맛을 본 엄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레마가 살포시 덮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아기처럼 좋아했던 엄마. 믹스커피만큼의 부드러움에 블랙커피의 깔끔함까지 더해졌으니 신세계 같았을 것이다. 캡슐 하나를 기계의 홈에 집어넣고 버튼을 누르는 나에게 엄마는 어김없이 말했다.

"나, 하나 다는 못 먹는데? 나랑 나눠 마실래?"

그럼 나는 마지못해 "그래요."하고 말았지만, 커피 한잔을 나눠 마시는 것만큼 흥을 깨는 일이 없다고 믿는 나였다.


'무릇 커피란 입에 크레마가 닿는 순간부터 컵 바닥에 남 원두 부스러기를 확인할 때까지 온전히 나 혼자 즐겨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나다. 그런데 그걸 나눠 마시자고 하다니... 성질 더러운 나에게 나눠마시는 커피는 첫 모금을 마시기 전부터 이미 커피 아닌 무엇이 돼버렸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캡슐커피부터 찾던 엄마에게 몇 년 전 캡슐커피머신을 선물했다. 작동법을 알려주고 너무 진하면 뜨거운 물 섞어 드시라고 일러드렸다. 캡슐 떨어질 때를 가늠해 주기적으로 배달시켜드렸다.

며칠 전 배달완료 메시지가 뜸과 동시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뭘 또 시켰어~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올해는 그만 보내도 되겠어. 연말까지 먹을 것 같아."

"사드린 지 한참 된 것 같은데요? 아끼느라 못 먹은 것 아녜요?"

엄마는 아침에 한잔을 진하게 뽑아놓고 조금씩 물을 부어가며 하루 종일 마신다고 했다. 아까워서가 아니라 한 번에 한 모금씩, 하루 종일 나누어 먹는 오랜 습관 때문이었다. 하루에 세 잔씩 마시는 나를 기준으로 엄마에게 배달해 드렸으니 엄마네 집 캡슐은 점점 적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파트 2층인 엄마네 집은 바깥 화단에 심어진 대추나무, 목련 등이 창문 높이를 훌쩍 넘기고 자라 흡사 개인정원 같은 풍경이 만들어진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는 게 제일 행복하다는 엄마. 테이블 위에는 반쯤 남은 식은 커피 한잔이 늘 놓여있다.

2020년 <샘터>잡지에서 브런치에 실린 내 글을 보고 엄마를 취재왔었다.

...

내 사주팔자에는 '주변에 커피 나눠마시자는 사람이 반드시 있음'이라고 쓰여있는 게 분명하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려고 서 있으면 옆에 있던 남편이 나를 그윽하게 보며 속삭인다.

"나 하나 다 못 마시는데, 하나 사서 나눠마실래? 아 참. 당신 그거 싫어하지? 하지만 두 잔 사기는 아까운데?"



* 매거진의 이전 글, 김장훈 작가님의 <커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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