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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28. 2022

나의 친애하는 도박단

보글보글 글놀이 < 가까운 이웃 >

가만있어보자... 우리의 첫 만남이...

그랬다. 우리는 초등 1학년 같은 반 학부모라는 예의 바르고 공적인 관계로 시작했다.

"OO어머니~ 안녕하세요~"

"아. **이 어머니시구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우리 애가 **이랑 짝이라고 하더라고요~"

학부모 참관수업이나 운동회날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인사말을 나누던 사이가 우리였다. 녹색어머니회, 학부모 폴리스, 보람교사 등의 이름으로 학교 봉사에 참여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만남이 잦아졌고 어느새 밥 한 끼, 차 한잔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을 동반해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를 가고 1박 2일 여행도 가게 됐다. 들뜬 기분에 잠 못 들고 노는 아이들 틈에서 우리도 우리만의 놀이를 찾았는데, 그게 꽤 재미있었다. 날새는 줄 모른 채 'go!'라고 외치기를 수십 번. 우리의 관계는 go를 외치기 전과 후로 나뉘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낮술은 애미애비도 몰라본다던가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일탈의 달콤함은 치명적이다. 정신없이 살림하고 아이 키우던 엄마들이 맛본 화투의 맛은, 극강의 달콤함이었다. '주부도박단 일망타진'이라는 뉴스 속 주부들의 마음이 한편으로는 이해되기도 했다. 화투는,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루는 바빴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등교한 틈을 타 신나게 놀려면 빡빡한 주부의 스케줄을 더 촘촘히 쪼개야 했다. 책임감 강한 사람들만 모인 탓에 살림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러니 만나기 전에 서둘러 집안 청소를 말끔히 해야 했다. 저녁 준비할 시간을 아껴가며 놀기 위해 반찬을 하나씩 만들어서 모였다. 여섯 명이니 하나씩만 만들어와도 한집에 여섯 개의 반찬이 뚝딱 준비되는 것이었다. 몇 시간을 실컷 놀고 나서 반찬이 가득 담긴 종이봉투를 하나씩 들고 조용히 헤어졌다.


소소한 반찬을 나누다 보니 스케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오이 300개로 오이지를 담그거나 고추 20kg을 사서 장아찌를 담갔다. 먹이 잔뜩 들어 고소한 먹꼴뚜기 500g짜리 열봉을 사서 한 봉씩은 들고 가고 나머지는 그 자리에서 반찬으로 볶아 나눴다. 화투 한판에 참가자는 세명이니 노는 세명은 일을 한 것이다. 국멸치 똥을 따거나 멸치 볶음을 만들었다. 땡감 10박스를 배달시켜 곶감을 만들기도 했다. 둘은 씻고 둘은 껍질 까고 둘은 실에 묶어 박스에 다시 착착 담아 헤어질 때 나누어 들고 가 각자 집 베란다에 널었다. 순전히 제대로 잘 놀기 위한 우리의 발악이었다. 놀 때 놀더라도 생산성 있게 놀기.


'금품을 걸고 승부를 다투는 일' 도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형법은 도박의 성질·방법·횟수·액수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해 상습도박을 처벌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어느 것 하나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당당했다.

우리의 놀이는 승부를 다투지 않았다. 글 제목에 떡하니 도박단이라고 해놓고 '건전'이라는 단어를 붙인다는 것이 의아하겠지만, 그랬노라 떳떳이 말할 수 있다. 승부를 다투거나 이익을 취하기 위함이 목적이 아니라 유희 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한판 한판에서 깨우치게 되는 인생의 교훈에 감탄했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하는 문제 해결 능력에 감복했다. 이기고 지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만이 기쁨이고 놀지 못하는 것만이 슬픔이었다.

우리의 놀이에는 금품이 걸려있지 않았다. 물론 돈이 걸려야 재미가 있으니 판돈을 준비했는데, 가짜 돈이었다. 가짜 돈 3만 원이 든 돈가방 여섯 개를 준비해 플레이어에게 나누어주었다. 3만 원을 탕진하고 나면 가상은행에서 또 가짜 돈 3만 원이 든 가방을 준다. 그냥 막 써도 된다는 얘기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진짜 돈도 아니니까. 단 페널티는 있다. 그날의 꼴찌가 회비로 5천 원을 묻어야 한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생일 파티를 하고 각종 경조사비를 지출했다. 우리가 모여 화투를 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렇게 모여서 수다 떨고 노는 게 즐거웠다는 것.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충실히 살았다. 어떤 이는 우리 모임의 아이들에게 수년간 영어를 가르쳤고 나는 3년간 디베이트를 가르쳤다. 또 어떤 이는 코딩 자격증을 따서 취업을 했고 나는 디베이트 학원을 차렸다. 어떤 이는 매일 춘천으로 버스 타고 일을 다녔고 나는 자원봉사를 다녔다. 어떤 이는 몇 년간 암 투병을 했고 우리는 병원으로, 요양병원으로 귀찮게 쫓아다녔다. 어떤 이는 남편 사업이 잘못 돼 친정살이를 해야 했고 우리는 그때도 그녀를 불러 화투를 쳤다. 즐겁게, 행복하게, 정신없게...


3년 전, 코로나가 우리의 즐거움을 앗아갔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만날 수가 없었다. 카톡방에 서로를 그리워하는 글만 쌓여갔고 회비 잔고는 줄어들었다. 화투를 못 쳐 심심해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냈지만 나의 친애하는 도박단은 3년을 용케도 버텼다.

코로나로 확진된 이의 집 앞에 과일이며 간식을 잔뜩 놓아두었다. 문고리에 깜짝 선물을 걸어놓고 달아나면 범인이 누군지 색출하느라 전화통에 불이 났다. 시골에서 감자가 올라오면 여섯 등분해 광장에 모여 나누고 헤어졌다. 유행하는 과자나 간식은 꼭 여섯 개씩 사서 함께 맛봤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자 함이었다. 친애하는 나의 도박단에게 화투는 뒷전이 된 지 오래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중독이 되어있었다.


그렇다고 여섯 명이 12년을 같은 마음으로 지내왔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랑의 작대기 연결이 매일 바뀌고 A가 B에게 C험담을 늘어놓다가 다음날엔 A와 C가 함께 D험담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끼리 싸워 우리가 어색해진 적도 있으며 우연히 남편들과 함께 모였다가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한 적도 있다. 크고 작은 갈등으로 휘청대기도 하고 가끔은 소원해져 며칠째 톡방이 조용할 때도 있다. 화투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리의 관계에서도 모두 일어났다. 울다가 웃다가 화내다가 화해하다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었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한패가 되었다가...


올해는 여섯 집의 아이들이 모두 고3이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보내는 중이다. 남은 회비를 탈탈 털어 입시 대박 기원 금반지를 맞추었다. 그렇게 극성스럽지만 훈훈하게 꽃들의 전쟁을 매일매일 치르며 살고 있다. 12년째. 이제 우리에게는 화투 말고도 우리를 끈끈하게 연결해주는 것이 셀 수 없이 많다.

나의 친애하는 도박단을 끊을 수 없는 이유다.


*  꽃들의 전쟁 은 저의 첫 브런치북이었습니다.

조악한 글이지만 그녀들을 위해 꼭 남겨두고 싶었던 기록이었지요.

인간관계에도 중독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이웃입니다.


* 대문 사진의 화투들은 지금껏 우리가 사모은 것들입니다.

여행 가면 그곳의 화투를 사들고 와서 저에게 갖다 줍니다.

언젠가, 세계 화투 전시회를 열고 화투 체험 부스를 운영하자며 깔깔 웃습니다.

화투에, 사람에 진심인 우리들입니다.


* 매거진의 이전 글, 김장훈 작가님의 글입니다.

* 매거진의 이전 글, 돋보기 시스템 작가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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