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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Dec 21. 2022

쟤네집 막내아들

[보글보글 매거진] 글놀이. '크리스마스 선물'

아버님~

아버님께 쓰는 편지글, 처음이네요. 시작도 안 했는데 마음이 콩닥거립니다. 무슨 말을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자주 만나는 사람은 할 말이 많지만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과는 날씨 얘기나 연예인, 드라마 얘기냐 해야겠죠. 아! 드라마 얘기 해드릴까요? 아범이 재미있다며 제게 추천해주었던 드라마인데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예요. 보셨을까요? 재벌집의 막내 손주로 환생한 주인공의 재벌집 길들이기라고 요약할게요. 특정 재벌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산업화 과정에서 감수하고 희생해야 할 것이 많았던 우리나라의 이야기가 아닐까. 암튼, 재벌집 막내아들을 보면서 아범한테 그랬어요. 재벌집 막내아들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당신은 그냥 '쟤네집 막내아들'이었다고요. 

처음 아버님을 뵈러 갔던 날이 생각납니다. 대리석 바닥에 벽난로가 있는 넓은 거실, 통창으로 보이는 아담하고 잘 정리된 정원, 자동으로 문이 올라가는 주차장, 주차장에서 거실, 거실에서 2층으로 연결되는 계단. 제가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재벌집이었습니다. 결혼하고 살면서 알았지요. 더없이 평범한, 그저 평화로운 가정이라는 것을요. 형제들끼리 물어뜯는 재벌집이 아니라 서로를 한없이 위해주는 평범한 쟤네집이라 다행이었습니다. 


투병... 중이셨지요. 아버님은 대학생 막내아들이 교제 중이던 저를 돌아가시기 전에 꼭 봐야겠다고 하셨어요. 아버님, 어머님뿐 아니라 결혼한 아주버님을 비롯해 오 남매가 모두 모여 저를 찬찬히 살펴보시던, 살 떨리던 그날이 아버님을 뵌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데, 한 번을 경험하지 못했네요. 그저 사진으로 혹은, 어머님의 옛날이야기로 소환되어 만나 뵌 것이 다지요. 


이번 크리스마스이브날, 가족들이 모두 모입니다. 매년 연말에 가족모임을 하는데 이번에는 저희가 내기로 했어요. 늘 큰 형님이 내셨는데 어머님이 올해는 저희 집에서 내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아버님의 막내 손주가 아버님이 졸업하신 학교에 합격했거든요. 아버님은 건축학과셨는데 막내 손주는 건설환경공학부예요. 어머님이 어찌나 좋아하시던지요... 손주 중에 한 명이라도 할아버지 뒤를 이어 주어 고맙다고 하셨어요. 아범은 아버님을 생각하며 여러 날 울었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나는 왜 아버지 살아계실 때 이런 효를 하지 못했을까' 하면서요. 이번 크리스마스에 아버님과 어머님께 멋진 선물을 드리게 된 것 같아 뿌듯하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사실 선물은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이예요. 

아버님 학교 후배가 된 막내 손주만 선물이 아니라는 말씀이에요.

큰 손주는요, 포기하지 않고 도전한 끝에 작년, 대학에 합격했어요. 공부도,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둘째 손주는요, 얼마 전 전역을 했습니다. 손주 중에 가장 살가운 녀석이라 주말마다 할머니를 찾아뵌다네요. 할머니댁에 가자마자 청소기부터 돌리고 냉장고 정리를 한대요. 어머님이 제게 일요일마다 너무 부담스럽다고 하소연하셨지만, 사실은 자랑을 하시는 거예요. 깔깔깔 웃으시며 이야기하시거든요. 세상에 그런 손자가 어디 있나요? 스물세 살 청년이 주말마다 할머니를 찾아가 청소를 해드리고 말벗이 되어드리다니요. 

셋째 손주는요, 전역을 한 달 앞두고 휴가 나와 있습니다. 전역 후 일하게 될 체대입시학원에 매일 눈도장 찍으러 가는 중입니다. 사회성이 좋아 친구, 어른 할 것 없이 잘 어울리고 마음 그릇이 큰 녀석입니다. 

이렇게 네 명의 잘 자란 손주들이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흐뭇하시죠? 

손주 중 한 명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올해는 가족 모임에 꼭 참석하셔서 손주들 얼굴 찬찬히 보시고 가셔요~ 


아버님 묘소에 가서 절을 할 때마다 제가 드린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도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 지켜봐 주셔요.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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