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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r 17. 2023

살아야 하는 이유. 그것도 열심히...

"어때요. 홀가분해요?"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 늘 우리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는 동네아주머니가 기습적으로 질문했습니다. 선뜻 답을 못하는 제게 그녀는 '홀가분'의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대답을 재촉했습니다. 

"군대 간 아들은 제대했고 둘째는 재수도 안 하고 대학생이 되었으니, 일단은 다 끝났네! 그쵸?" 


"그게... 홀가분하기보다는 허무하더라고요. 할 일이 하나도 없어진 거 같고 허전했어요. 그래서 1,2월은 몸도 마음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3월 되고 바빠지니 괜찮아지네요."

이렇게 대답을 하다 보니 뚜렷하게 보이더군요. 1,2월의 슬럼프가 뜻하는 바와 3월의 회복이 보여주는 슬럼프 극복법. 


제대한 아들은, 체대입시학원 강사를 하며 하루를 바삐 살고 있습니다. 

11시 기상, 12시 출근, 10시 퇴근, 여가생활 후 새벽 2,3시 귀가, 새벽 4,5시 취침. 

매주 목요일 밤 10시와 토요일 저녁 7시 풋살 모임 참여. 

학기 초였던 지난 2주간은 새벽 7시에 기상해 이른 출근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앞에서 학원 홍보 전단과 물티슈를 돌려야 한다면서요. 가족들과 생활패턴이 달라서 그렇지, 자신만의 루틴을 따릅니다. 


대학생이 된 아들은, 기숙사를 포기하고 집에서 통학을 합니다. 왕복 세 시간의 피로가 기숙사라는 낯선 환경에서 오는 피로보다 더 낫다는 것이죠. 아침마다 그날의 착장을 고민하고 가방을 꾸려 집을 나섭니다. 정신없던 수강신청을 끝내고 세팅된 시간표에 맞춰 등교하고 학식 먹고 수업 듣고 하교하는 루틴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허하답니다. 술을 싫어하니 술자리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싫고, 새로운 인연을 만드느라 피곤해지는 것도 싫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싶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 상황도 싫고...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던 아들은 학교 홍보대사 선발에 지원했습니다. 1차 서류심사에 합격하고 면접까지 마친 아들은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불합격 통보를 받자 또 한풀 꺾여버린 의욕을 하소연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좀 해보려고 했더니 또 안되네. 인생이 너무 덧없어.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남들은 다 뭘 해야 하는지 왜 열심히 해야 하는지를 알고 사는 것 같은데 나만 모르는 것 같아. 누가 이렇게 하라고 딱 정해주고 명령했으면 좋겠어."


- 엄마가 이것저것 해보라고 해도 그렇게 안 하잖아. 늘 싫다고 하지 않니?


"그건 내가 별로 원하지 않는 걸 권하니까 그렇지. 내가 원하는 걸 딱 알아서 명령해 줬으면 좋겠다는 얘기야."


- 그런 일은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일어나지 않아. 아무도 내가 좋아하는 걸 딱 알아서 권할 수는 없어.


"알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찾아서 열심히 살잖아."


- 그게, 꼭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기 때문에 열심히 사는 건 아닐 수도 있어. 찾지 못했기 때문에 열심히 사는 걸 거라고 생각해. 엄마가 디베이트를 좋아하고 봉사를 좋아해서 열심히 하는 건 맞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야. 확신도 없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도 늘 의문이었지. 그런데 하다 보니까 보인 거야. 좋은 점도 보이고 열심히 해야 할 이유도 보이고. 언젠가 이게 아니다 싶을 날도 오겠지. 그럼 그땐 또 다른 걸 찾으면 되는 거고. 인생은 그런 거 아닐까? 가만히 밥만 먹고 숨만 쉬며 사는 건 인간 생리에 안 맞아. 사람은 늘 의미 있고 재미있는 일을 찾게 마련이거든. 그런데 그게 뭔지는 모르니까 이것저것 시도해 보며 사는 거야. 죽을 때까지 못 찾을 수도 있고 운이 좋아 찾게 되면 더 신나고 즐겁게 살게 되겠지. 


"어려워. 사는 게 너무 어려워. 그래서 다 귀찮아."


- 어렵지. 그런 고민을 내내 하면서 사는 건 귀찮은 일이야. 그렇다면, 매일 침대에 누워 드라마, 영화만 보고 싶은 거야?


"그건 아니지..."


- 엄마가 맨날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경험해 보라는 이유가 그거야. 해보지 않으면 네가 어떤 일에 흥미를 갖는지 알 수가 없거든.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른 일을 찾으면 되는 거고, 괜찮으면 몇 년 더 해보는 거고.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해 봐. 인생이 복잡한 거 같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단순해~ 


"1학기 마치고 군대나 가버릴까 봐."


- 군대는, 해법이 될 것 같아?


"정해진 시간에 시키는 일이나 하면서 단순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 막상 해보면 그런 삶이 그리 행복하지는 않을 걸? 물론 너한테 딱 맞는 길일지도 모르지. 말뚝 박는다고 할지도... 그런데 그전에, 신검부터 받아야 하지 않겠니? 


"아... 그것도 학기 중에는 시간이 안 나니, 방학 때 신검받으면 언제 군대를 가냐..." 


- 무슨 신입생이 이렇게 무기력하고 염세적이야? ㅎㅎ 이런 고민을 친구들과 나눠보는 건 어때? 요즘 자주 만나러 나가더구먼... 만나서 무슨 얘기해? 


"친구들에게 이런 고민을 늘어놓는 건, 예의가 아니야. 태반이 재수 중인데 서울대 현역 합격생이 이런 고민을 한다고 하면 얼마나 재수 없겠어..."


- 하긴, 그렇겠네. 그런데 있잖아. 그런 고민, 엄마는 좋다고 생각해. 고민 없는 삶이 문제인 거지. 하지만 답을 찾는 것은 결국 너라는 것만 알아둬. 엄마는 이야기 나눠줄 수 있지만 답을 줄 수는 없어. 나도 답을 모르거든... 


...

무엇이든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하려는 큰아이와 달리 무엇이든 엄마와 대화하면서 해결책을 모색해보고 싶어 하는 작은아이 덕분에, 입시종료와 함께 끝날 줄 알았던 마주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긴,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 서로의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꺼내 보일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죠. 


가족은 동지입니다. 부모 자식의 관계를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지.

가정은 둥지입니다. 바쁘고 지친 일상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언제든 편히 쉴 수 있는 둥지. 

둥지에 모여 동지들이 떠드는 대화를 기록합니다. 

새둥지를 꾸렸을 때 헌 둥지에서의 마주이야기가 도움이 되기를... 

기록이 기억을 소환해 내내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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