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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pr 08. 2023

아내는 뭐 하셔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느라 늦는 줄 알았던 남편이 얼큰하게 취해 귀가했습니다. 고주망태가 차라리 나았겠다 싶을 정도로 어중간하게 취한 날이었죠. 그런 날은 잠도 안 자고 자꾸 말을 시키거든요. 술자리에서 지인들과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제 생각을 듣고 싶다고 추근대는데.... 풀린 눈과 꼬인 입, 느끼한 분위기가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습니다.


"당신 김 OO사장 알지? 그 사람이 당신 요새 뭐 하냐고 묻더라? 애들도 다 성인 되었으니 이제 뭘 좀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답을 잘 못하겠는 거야. 당신을 뭐 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 나? 디베이트 코치잖아. 교육자원봉사자고.

"알지. 그런데... 디베이트를 가르친다고 하면 디베이트가 뭔지 한참을 설명해야 하고 교육자원봉사를 하러 다닌다고 하면 왜 돈 안 벌고 봉사하러 다니냐고 하니 그것도 설명하기 애매해서... 그냥 얼버무렸지."

- 디베이트 말고 그냥 토론 가르친다고 하면 되지. 강사 하면서 돈도 벌고 봉사도 한다고 하면 되고. 그게 그렇게 설명하기 힘든 일인가?


순간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아마 남편은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겠지요. 아내 얼굴에 스친 서운함, 허무함 혹은 '흥칫뿡'을 엿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했다는 것을 감지했겠죠.

"당신이 워낙 하는 일이 많고 바쁘니까 그렇지. 뭐라 딱 하나 꼬집어서 말하기가 힘드니까. 알지 알지. 당신이 디베이트 강사이고 교육자원봉사하는 사람인 거 나는 잘 알지."

수습하려고 애쓰는 남편이 딱해 긴말 안 하고 넘어갔습니다만 이미 제 맘 호수엔 작은 돌덩이 하나가 퐁당 하고 던져진 상태. 잔잔한 파문이 자꾸 절 건드렸습니다.


'난 뭐 하는 사람이지? 흔히들 말하는 직업이라는 게, 나에게 있던가?'

프리랜서 강사라고 하면, "뭘 가르치세요? 어디에 소속되어 활동하시는 건가요?"

디베이트 코치라고 하면, "디베이트가 뭐예요? 학원을 하시나요?"

학교에 나가서 강의한다고 하면, "방과 후 강사예요? 교과시간에 한다고요?"

교육자원봉사자라고 하면, "그게 뭐예요? 봉사라면 돈은 전혀 안 받나요?"

라고 물어올 것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정성껏 답을 드리는 건 어디까지나 저의 몫입니다. 제가 선택한 삶이니까요. 하지만 남편 입장에서는 답답하겠지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 같거든요.

"저희 아내는 디베이트 강사인데, 돈을 잘 벌어요. 그래서 시간 날 때 교육자원봉사를 하고 있죠."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저의 '일'을 명확한 '직업'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것은 적절한 수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꾸준히 하면 결국 알아봐 주고 찾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기약 없는 희망을 품고 보잘것없는 수입에 기뻐하며 사는 대책 없는 사람에 불과하다며 스스로 마음을 쪼그라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교육자원봉사센터장이 되었다는 것도 여기저기 말하기가 면구스럽습니다.

"결국 공무원이 되셨군요?"

"센터장 되면 뭐 좋은 게 있어요?"

이런 질문을 몇 번 받고 나니, 저간의 일들은 저에게나 의미 있는 사건이더군요. 그래서 함구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통 전화를 못 드린 친정어머니에게는 변명 삼아 말씀드렸는데, 반응이 예상을 벗어나지 않으시더군요.

"공무원 된 거니? 그거 몇 년 하면 공무원 되니? 나 아는 OOO 씨는 동사무소에서 몇 년 일하다가 공무원 됐다더라. 너는 그런 기회가 없는 거니? 그럼 넌 뭐가 되고 싶어서 그걸 하는 거니?"

어머니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가 봅니다.

"우리 딸이 교육자원봉사를 그렇게 하더니, 이번에 교육청 공무원 됐어~"


저에게도 꿈과 야망은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시대에 인간이 가져야 할 것은 비판적 사고, 질문하는 힘이라는데 그걸 키우는 데는 디베이트가 딱이다!'라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이제 우리 업계도 빛을 제대로 볼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학원 하나 크게 제대로 차려 함께 하면 좋겠다는 선생님들도 있고 그때까지 내공을 쌓는 일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 앞에서는 주눅이 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교사, 공무원, 변호사, 판사, 의사, 회사원, 자영업자 등 명확하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아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일은 AI에게 잠식당하기 쉽겠지만 저처럼 뭐라고 콕 집어 말하기 힘든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AI도 관심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뭘 하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보렵니다. 이렇게 현재의 무위를 정당화하는 군소리를 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글 쓰는 것도 그러하네요. 책 한 권 낸 적도 없고 그저 브런치에서만 작가라는 신분으로 살고 있는 저는, 어디 가서 작가라고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합니다. 언젠가 쌓인 글로 책도 쓰고 강연도 다니는 꿈과 야망을 품고 살면서 일단 꾸준히 쓰며 살자는 다짐, 다짐, 또 다짐만... 

제 삶이 준비만 하다 끝나지만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언젠가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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