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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pr 20. 2023

게임 총량의 법칙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남편이 요즘 매일 밤 하는 일이 있습니다.

뜨거운 물을 욕조에 가득 채우고 들어가 반신욕이라도 하냐고요?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다시 마라톤을 시작했냐고요?

따끈하게 데운 한약을 정성스럽게 들이켜냐고요?


남편은 피로를 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게임'을 선택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아들이 지난겨울 자기 자신에게 선물했던 게임기를 아들보다 남편이 더 많이 사용 중입니다. 게임기를 들고 침대에 누운 남편은 한참 동안 게임을 합니다. 옆에서 들리는 게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드는 저는 청소년기 아들들에게나 하던 잔소리를 50세의 남편에게 늘어놓습니다.

"OO아~ 게임 이제 그만하고 얼른 자거라! 피곤하다면서 왜 밤늦게까지 게임이니?"

반말로 잔소리를 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진짜 잘 만들었어... 정말 대단한 게임이야..." 라며 한껏 신이 났습니다.

잔소리는 한 번 해서는 통하지 않는 법.

"얼른 주무셔~ 언제까지 하다가 자려고 그래~"

아내가 잔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남편은 모험에서 빠져나올 줄을 모릅니다.

"아~~~~~ 아깝게 실패했어...."

그러면서 작은 아들에게로 뛰어가 공략법을 묻습니다. 때로는 자력으로 깨기 힘든 판을 깨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아니 요새는 왜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해!!!!"

'하라는 공부는'이라는 수식어는 뺐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공부를 하라고 한 적이 없거든요. 4년 전부터 국가자격증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남편은 작년에 경영지도사 자격증 취득 이후로도 계속 다른 자격증에 도전 중입니다. 올해는 두 개의 국가 자격증 2차 시험에 도전 중이지요. 회사 다니랴 틈틈이 공부하랴 바쁜 와중에 스트레스 해소차원에서 게임을 하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점점 그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게 문제죠.



아들을 키우는 데 있어서 게임 시간 관리는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함께 정한 약속을 잘 지켜주었습니다. 조금은 파격적인 제안을 했기 때문이지요.

"주중에는 게임 금지. 시험 2주 전 게임 금지. 주말에는 밤 9시 전까지 무제한. "

다음날 학교에 가야 하는 주중에는 게임을 금지했습니다. 일요일에는 밤 9시 전에 꺼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고요. 게임 화면이 잔상으로 남아 학교 공부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대신 주말에는 가족 외식, 행사, 여행 등의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원하는 만큼 실컷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이들은 정말, 미친 듯이 게임을 했습니다. 저러다 죽겠다 싶을 만큼요. 금요일 밤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토요일 0시부터 밤새 게임을 한 적도 있습니다. PC방도 가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 실컷 있고 잔소리도 안 하는 집이 훨씬 편하고 좋다는 이유였습니다. 남편과 저는 아이들을 게임에서 빼내기 위해 주말마다 외식, 여행, 부모님 댁 방문을 계획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게임을 원 없이 실컷 한 아들들은 게임을 향한 갈증이 없어졌는지 자기 할 일을 알아서 했습니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큰 아이는 축구를 하거나 다른 놀이를 찾아 나섰고 작은 아이는 공부를 했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둘 다 여전히 게임을 자주 하지만 그건 중독의 개념이 아니라 '여가활동 중 하나'로 즐기는 수준입니다. 저는 이러한 결과가 그들이 평생 해야 할 게임 총량을 거의 채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리학에는 '에너지는 그 형태를 바꾸거나 다른 곳으로 전달할 수 있을 뿐 생성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 항상 총량은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 응용해 사람들은 다양한 법칙을 만들어냈지요.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지랄 총량의 법칙'입니다. 누구나 평생 하게 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정해진 양을 사춘기에 다 써버리고 그러지 않은 사람은 나중에 언젠가 꼭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보면 '게임 총량의 법칙'이 진짜 있구나 싶습니다. 남편이 중학생 때 오락실에 가느라 땡땡이를 친 적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로는 총량을 채우지 못했나 봅니다. 50이 되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게임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죠. 게임 속 주인공이 되어 모험을 떠나는 야심한 밤이 얼마나 행복할까요?

남편을 보며 '지랄 총량의 법칙'도 실제로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한없이 착한 아들로 사느라 쓰지 못한 걸 결혼 후 제게 쓴 것 같습니다. 다행히 총량을 채운 것 같기는 하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총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길이 없으니까요.


최근 남편이 다니는 프랜차이즈 회사에서 매장 하나를 열었는데 직원이 구해지지 않아 한동안 남편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일주일 넘게 밤 12시까지 일하다 들어온 남편은 홀서빙 일이 너무 힘들다며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대신 일해줄 수 없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농담 한마디였지요.

"여보~ 알바 총량의 법칙도 있나 보다. 당신은 대학시절에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 실컷 쓰며 사느라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없잖아? 그걸 지금에서야 채우나 봐."

헛헛하게 웃던 남편은 게임기를 챙겨 들고 게임 총량을 채우러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OO 총량의 법칙을 알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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