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야구에 관심이 없습니다. 호, 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야구라는 스포츠가 있다, 남편이 좋아한다, 남편은 두산 팬이다' 정도의 정보만 갖고 살아갑니다. OB 베어스 리틀야구단 출신인 남편은 야구 시즌이 되면 엉덩이가 들썩입니다. 몇 년에 한 번씩은 혼자서 잠실구장을 찾기도 합니다.
우리 부부가 대학생 시절에는 야구장 데이트를 즐기곤 했습니다. 그때는 야구 관람이 즐거웠던 것도 같습니다. 결혼 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야구장을 자주 찾았습니다. 야구보다는 야구장에서 먹는 치킨에 관심이 많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원체 야구에 무관심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야구장에 안 가본 지 어언 15년은 된듯합니다. TV 야구 중계를 보며 열심히 응원하는 남편을 볼 때나, 가족끼리 주말 야구장 나들이를 다녀왔다는 동네 언니의 말을 들으면 '나도 언제 한번 같이 가줘야지...' 하는 마음이 일곤 했지만 시간도 잘 안 맞고 이래저래 기회가 안 생겼습니다.
"야구장에서 맥주 마시기 딱 좋은 날씨네."
지난 일요일,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남편에게서 온 문자 한 통에 마음이 동했습니다.
"가자!"
아내의 OK 사인에 신이 난 남편은 바로 예매를 하고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한참은 더 끓여야 하는 갈비탕 가스불을 끄고, 개고 있던 수건을 거실 소파 한쪽에 그대로 쌓아놓은 저는 서둘러 채비를 했습니다. 지금 출발해도 야구가 시작한 후에야 구장에 들어갈 터, 마음이 급했습니다.
일요일 늦잠을 즐기는 큰아들에게 "엄마, 아빠 야구장 다녀올게~"라며 인사를 하니 아들은 비몽사몽 허우적대다 놀란 눈으로 물었습니다.
"야구장? 갑자기? 왜?"
둘이 깔 맞춤한 듯 청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도 챙기고 혹시 모르니 보조 배터리까지 챙겨서 집을 나섰습니다.
"야구장에 가서 떡볶이에 치킨에 맥주 마셔야지~ 맥주는 비싸니까 편의점에서 네 캔 사갈 거야."
남편은 한껏 들떠 있었습니다.
- 그래서 가방을 메고 온 거구나?
"남편이랑 데이트 가니까 좋지?"
- 아니거든? 그냥 그렇거든?"
우리는 연애라도 하듯 손깍지도 잡고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며 야구장으로 향했습니다.
서울행 버스를 타고 건대 입구역에서 내려 지하철로갈아타기 위해 개찰구를 향하던 그때. 남편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발신자 이름을 보며 남편은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습니다.
"네? 오늘이라고요? 지금요? 아... 제가 문자를 확인 못했네요... 다음 주가 아니라 이번 주였군요. 벌써 와 계시다고요? 제가 깜빡하고 조금 멀리 와있기는 한데...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기다려주셔요."
우리는 그 길로 지하철역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예매했던 야구 관람권을 취소하려 했지만 취소 가능 시간을 넘겨버려 환불도 안 됐습니다.
"아휴... 멍청이... 왜 그 톡만 확인을 안 했지? 왜 알림 설정을 안 해놨지? 아... 내 팔자에 무슨 야구장은..."
남편은 자책, 자괴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 어쩐지 오늘따라 마누라가 막 가자고 하더라 그지? 하하. 괜찮아.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뭐. 살면서 이런 일 한 번 안 생기나 뭐? 내가 야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신 혼자 되돌아가라고 하고 나 혼자 야구장에 남아서
관람할 텐데. 그러면 돈도 반은 아낄 수 있었던 건데 말이지. 얼마라고 그랬지?
"3루 쪽이라 한 좌석당 18,000원... 수수료까지 해서 38,000원...."
-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 기부했다고 생각하자~
"남편이랑 데이트 못해서 섭섭하지?"
- 아니거든!!! 안 섭섭하거든!!!
그때 차창 밖으로 잠실 구장이 보였습니다. 갔지만 못 간 그곳.
회사로 향하느라 남편은 중간에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에 홀로 남아 집까지 가는 길, 라디오에서는 이문세의 노래가 연이어 나오고 마지막에 <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 이 나오더군요. 원래 가사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돈 보다 더 귀한 게 있는 걸 알게 될 거야. 사랑 놀인 그다지 중요하진 않은 거야. 그대가 마음먹은 대로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슬픔보단 기쁨이 많은 걸 알게 될 거야 인생이란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중요해"인데 제 귀에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세상은 살아지지 않지만 실망하지 마라. 결국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이렇게 들렸습니다. 참 절묘하게 와닿는다고 생각했죠.
남편은 자신이 야구 덕후는 아니라고 항변할 테지만 아무튼 작정하고 덤볐던 남편의 야구 덕질이 닭질로 끝나 버린 날이었습니다. 길에 뿌린 돈이 아깝고 약속을 잊은 자신에게 화가 나고 오래간만에 나선 아내와의 시간을 망쳐버려 무안해진 남편. 무엇보다 오래간만에 야구장 간다고 설렜고 부풀었던 마음이 뻥! 터져버려 속상했을 테죠. 건망증도 갱년기 탓, 갑자기 올라온 야구장을 향한 향수도 갱년기 탓으로 돌리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야구에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날이 너무 좋았고, 시끌시끌한 야구장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야구지만 그래도 애써 아는 체하며 시원한 맥주 한 잔 들이켰으면 더 좋았을 테고, 바삐 사느라 야구장 함께 가주지 못해 미안했던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었을 테고, 신이 난 남편의 얼굴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집으로 돌아와 가스불을 켜서 갈비탕을 마저 끓이기 시작했고 개다 만 수건을 갰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다가 문득 맥주캔을 따고 시원하게 들이켰습니다. 순식간에 두 캔을 마시고 낮술에 취한 저에게 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