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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y 02. 2023

응~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식탁 위에 올려놓은 밀폐용기를 열어 손바닥 반만 하게 잘라놓은 김을 입에 욱여넣으며 남편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구운 김이 제일 맛있어~ 아! 맞다!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선물 받은 날김 한 톳을 그냥 둘 수가 없어 들기름 바르고 소금 뿌려 구워두었더니 남편은 밀폐용기를 볼 때마다 좋은 내색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 짠 걸 맨입에 왜 먹어~~~ 그리고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저는 손가락에 뭍은 기름을 바지에 쓱 닦는 남편에게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습니다.


최상의 간식이자 밥반찬, 그리고 자신의 건강 비결로 김을 꼽는 남편입니다. 대장내시경으로 확인한 뽀얀 자신의 대장 비결은 김 덕분이라고 주장합니다. 밥상 가득 찬이 올라와 있어도 "김 없어?"라며 김부터 찾습니다. 남편의 김사랑은 그 역사도 오래되었습니다. 시판 조미김이 없던 시절, 어머님이 김을 잔뜩 구워놓고 잠들면 막내아들이 몰래 나와 식탁 의자 몇 개를 이어 붙여놓고 그 위에 누워 TV를 보면서 야식으로 김을 몽땅 먹어버렸다는 일화는 여전히 시어머님 단골 레퍼토리입니다.


결혼 후 확인한 남편의 김 사랑은 명불허전이었습니다. 한 끼에 식탁김 두세 봉은 기본이었죠. 짜고 기름진 김을 먹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저는 구워 나온 날김을 사주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좋은 기름에 좋은 소금 뿌려 구우면 좋겠지만 약한 불에서 살짝살짝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야 하는 김 굽기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남편도 금세 구운 날김에 적응이 되어 '조미김은 짜다, 우리 집 날김이 맛있다'라며 십수 년간 날김을 반찬과 간식으로 애용했습니다.

그러던 남편이 두어 해 전부터 조미김만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때 먹었던 입맛으로 회귀하는 것, 이것도 갱년기 증상일까요? 생김에는 손이 덜 가는지 제 손으로 직접 식탁김을 사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모처럼 아내가 손수 구운 김을 먹었으니 "당신이 구운 김이 제일 맛있다"를 연발할 수밖에요. 그래도 눈치는 있어서, 째려보는 아내를 향해 바로 자신의 발언을 정정합니다.

"아. 맞다. 이런 말 하면 안 되지?"


여성의 가사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발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무 장을 굽는데 꼬박 한 시간이 걸리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도 아닙니다. 남편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런 말을 들은 제가 결국은 그 말에 갇혀 또 김을 굽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인 데다가 그깟 김 사 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남편의 뻔한 사탕발림이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하면 '그게 뭐라고... 그냥 해주자...'라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마는 사람이 저이거든요.


어쩌면 남편의 발언은 이미 저의 그런 성격을 꿰뚫고 몇 수 앞을 내다보며 한 말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여자는 내가 지나가며 하는 말에도 신경을 쓰고,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는 더 신경을 쏟는 사람이니 당신이 구운 김이 제일 맛있다는 말 한마디면 식탁에 직접 구운 조미김이 떨어질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계산을 끝마친 것이지요. 그의 손아귀에서 단단히 놀아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혹은, 

어쩌면 남편은 날이 갈수록 간이 커지는 병에 걸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갱년기와 함께 간이 배밖으로 줄줄 흘러나오고 있는지도...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 <무철부부>를 보면 신혼 때, 결혼 5년 후, 결혼 10년 후 이렇게 시간이 흘러갈수록 남편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아내의 도끼눈은 점점 커지던데 저희 집은 반대입니다. 남편의 목소리는 점점 간드러지고 아내의 눈흘김에도 굴하지 않는 모르쇠는 날이 갈수록 단단해집니다.


'이런 말 하면 안 된다는 것마저 알고 있다!'는 걸 알리면서 원하는 것을 결국 모두 말해버리고 마는 남편의 몹쓸병, 그 부을 대로 부어버린 간댕이는 며칠 전 또 한건을 했습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각, 술자리에 있던 남편에게서 톡이 왔습니다.

"혹시 내일..."

이렇게 보내놓고 한참을 뜸 들이다가,

"시루떡 해줄 재료 없죠?"라고 물어왔습니다. 자려고 누웠던 저는 벌떡 일어나 한바탕 퍼부어줄 요량으로 호기롭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인의 매장 개업식에 시루떡을 해줄 수 있냐는 남편의 말에, 입으로는 "응~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면서 저는 어느새 팥을 삶고 있었습니다. 끄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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