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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Nov 23. 2019

D-100 프로젝트 < D-36 >

< 집은, 공간이 아닌 사람이다. >


2005년 6월 30일.

결혼 후 5년간 살던 독립문을 떠나 죽전으로 자리를 잡았던 날이다. 이후로 쭉~ 이 집에 살았다. 거의 15년이 되어간다. 태어나서 한집에 이렇게 오래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 자체가 낯선 경험이다. 결혼 전까지는 사업하시는 아버지의 흥망에 따라 기억에 남는 것만 9번의 이사를 다녔다. 한집에서 이렇게 오래 산 적이 없기 때문에 집이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지에 대한 경험도 없었다. 그래서 요즘 집 여기저기를 볼 때마다 안쓰럽고 짠하고 기특하다. 너도 나처럼 나이를 먹는구나... 


처음 이사오던 때...

5살, 2살의 개구쟁이 두 명과 살기에 20층 아파트는 걱정 투성이었다. 한눈판 사이 창문 밖으로 떨어지면 어쩌나, 다락방에 올라가다가 다치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방충망을 고정시키는 장치를 창문마다 설치하고, 무언가 밟고 올라설 자리에 있는 창문에는 방범샷시를 달았다. 침입을 방지하는 용도가 아닌 추락을 방지하는 용도의 방범샷시. 다락방에는 '이놈 할아버지'가 살고 계셔서 올라갈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꼭대기층이어도 크게 덥지도 춥지도 않은 집이었다. 앞 베란다로는 다른 아파트 지붕과 광주로 넘어가는 산이 펼쳐져있어 함박눈이라도 내리면 알프스가 이럴까 싶은 풍경을 연출했다. 뒷베란다로는 온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자전거를 타는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이들은 밥 먹다가도 누군가가 나와있나 확인하고는 서둘러 놀러 나가곤 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떨어지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고 별 탈 없이 잘 컸다. 우리 부부와 함께 아이들을 키우고 보살핀 고마운 집이다. 

이사 오기 전, 다락방에 설렜던 큰아들.


우리집에는 유난히 사람이 많이 드나들었다. 

하교하는 아이들은 꼭 친구들과 함께 왔다. 한두 명인 날도 있었지만 10여 명의 친구들, 그것도 남자 중학생들로 바글바글하던 날도 숱하다. 간식비도 많이 들었고, 어떤 날은 한 시간 내내 김치전을 부치기도 했다. 

내 손님들도 많았다. 떡을 배운다고 동네 아줌마들이 들락날락거렸고 추석 때는 모여서 송편을 빚기도 했다. 신김치가 많다고 함께 모여 만두를 빚기도 했으며 11월이면 감을 말리겠다고 대여섯 명이 모여 감 몇 박스를 껍찔까서 실에 꿰고 하던 날도 떠오른다. 

그중 단연 1위는 2006년, 아버지 어머지 결혼 30주년 기념 파티 날이었다. 

가족, 친지들과 아버지, 어머니의 친구분들까지 40여 명을 초대했다. 여기저기서 공수한 음식들로 뷔페를 차렸고 있는 상 없는 상 끌어모아 방방마다 펼쳐놓았다. 동생이 만든 기념 동영상을 함께 시청하는 시간도 갖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감사인사를 듣는 숙연한 시간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시작이 어렵지, 그렇게 한번 물꼬를 터놓으니 이후 가족 모임은 자연스레 우리집에서 갖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집은, 오지라퍼 집주인과 손님들을 품었던 곳이다. 

부모님 결혼 30주년 파티장소였던 우리집. 아버지,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담은 영상을 시청중이다. 


15년을 살면서, 이방 저 방으로 가구를 많이도 옮겼다. 

안방만 유일하게 정체성을 잃지 않았지, 다른 방들은 계속 주인도 바뀌고 세간살이도 바뀌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잠자는 방, 공부방으로 나누었다가 어느 순간 각자 방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평생에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다시 잠자는 방, 공부방으로 헤쳐 모였다. 다 큰 아들놈들이 함께 자는 걸 보면 어찌나 뿌듯하던지... 그걸 또 며칠 전 다시 각자 방으로 분리해주었다. 

난, 책상과 책장, 침대를 옮기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혼자 힘으로 다 해낸다. 책장을 거실에 두었다가 방에도 넣었다가 베란다로 꺼냈다가 다시 방으로 옮긴다. 소파를 이쪽 벽에 두었다가 창문가에 두었다가 반대쪽 벽으로 옮긴다. 식탁을 벽에 붙였다가 떼었다가, 부엌에 있던 장을 현관 옆으로 옮겼다가 방으로 넣었다가... 

한마디로 생지랄을... 편다. 다음날 앓아눕더라도...

그렇게 우리집은 15년간 나와 함께 요렇게도 변해보고 조렇게도 변해봤다. 지루할 틈 없이...

이사올 때 계획한 공간 배치...이후로 끊임없이 변했다.


폭이 넓은 베란다는 앞마당이었다. 

마루를 깔았던 시절에는 아이들 놀이터였고, 마루를 뜯어낸 후로는 감도 말리고 무도 말리고 된장도 담그고 빨래도 너는 시골집 앞마당이 되어주었다. 커피 테이블을 놓고 화초를 가꾸며 고상하게 커피나 마시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겠건만 나와 우리 집은 그러지 못했다. 무언가를 담그고 널고 말리고 하느라 1년이 정신없는 공간이었다. 

앞마당같은 베란다... 멋진 풍경도 선물한다.



길건 짧건 여행 후 집에 들어오며 하는 첫마디는 "와~~ 우리집이 최고다~"이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와서 편히 쉴 수 있는 곳. 

술 취한 남편이 용케도 찾아오는 곳. 

언제나 늘 그 자리에서, 가족의 냄새를 품고 있는 곳. 

찢어진 벽지에도 사연이 묻어나고 썩어버린 나무 바닥에도 추억이 서려있는 곳. 

우리의 사랑, 우리의 분노, 우리의 기쁨, 우리의 서글픔... 함께 껴안고 견뎌온 곳. 

누가 있건 없건 들어오면서 "다녀왔습니다~~"라고 외치는 가족들의 인사를 받아주는 곳. 

집이 공간이 아닌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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