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왼팔로 총신을 받치고 오른손 검지를 방아쇠울 안에 넣었다. 엎드린 자리가 편안했다. 안중근은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를 방아쇠에 걸었다. 안중근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반을 내쉰 다음 숨을 멈추었다. 바위는 보이지 않고 노루만 보였다. 조준선 끝에서 총구는 노루의 몸통에 닿아 있었다.
오른손 검지 둘째 마디는 안중근의 몸통에서 분리된 것처럼, 직후방으로 스스로 움직이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의 반동이 오른쪽 어깨를 때렸다. 총의 반동에 어깨로 맞서지 않고, 몸 안으로 받아들여서 삭여내야 한다는 것을 안중근은 소싯적부터 알고 있었다.
김훈, <하얼빈>
삼일절 아침, 태극기를 찾아 나섰다. 오래전 어머님 댁 청소를 하다가 발견해 가져왔던 게 어디 있을게다. 기다란 원통 안에 들어있었던 기억을 떠올려 신발장을 열어보았다.
가장 오른쪽 신발장을 열었다. 폭이 좁은 선반이 층층이 늘어선 이곳에 태극기가 있을 리 없다. 가운데 신발장을 열었다. 회전식 신발장이다. 신발장 한쪽을 잡아당겨 반 바퀴만 회전시켰다. 안쪽 공간을 확인했다. 텅 비어있었다. 왼쪽 신발장을 열었다. 검정 장우산 서너 개, 빨간 낚싯대 가방, 연두색 배드민턴 라켓 가방을 걷어내니 구석에 숨어있던 잿빛 국기함이 나타났다.
OO 은행이 쓰여있는 플라스틱 국기함은 단단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기분 나쁘게 굳어버린 먼지도 붙어있었다. 기다란 원통형의 윗부분에는 짧은 고리가 달린 뚜껑이 달렸는데 열어보려고 돌렸지만 꿈쩍도 안 했다. 반대편인 아래쪽도 마찬가지였다. 돌리는 게 아닌가 싶어 잡아당겨 봤지만 소용없었다. 집에 아무도 없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난간에 달린 빈 깃대봉을 쳐다보며 입맛만 다셨다.
다음날 남편에게 부탁했다. 전날 내가 했던 방식을 똑같이 따라 하던 남편은 커터 칼로 입구를 잘라내자고 했다. 뚜껑과 몸체 사이를 도려내면 큰 힘 들이지 않고 태극기에 상처를 내지도 않으면서 꺼낼 수 있을 터였다. 천잰데? 하지만 지금 열어봐야 삼일절은 끝났으니 다음 국경일에 거사를 치르기로 했다.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은 국기함처럼, 어차피 안된다는 생각에 포기해 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 까짓것 커터 칼로 잘라버리면 그만인데, 모험정신을 발휘해 도전하지 않은 순간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그래서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것들은 무엇일까.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