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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Oct 13. 2021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의 단상



어쩌다 보니 젊은 시절 공부하던 런던을 빼고는 러시아가 두 번째로 오랜 기간을 머물렀던 나라가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머물 때는 근교의 레닌의 흔적을 쫓기도 해보고, 혁명의 도시 생페테르부르그에서는 겨울궁전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과 백성들에게는 가혹했던 여제 예카테리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에르미타쥬 박물관의 전시실을 다리가 아프도록 걸음 했다. 







어디 그것뿐이었으랴.

머무는 기간 내내 젊은 시절 베짱이의 삶을 후회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톨스토이를, 푸시킨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있었던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볼쇼이의 공연을 보는 내내 “참 심심한 삶을 살았구나”하고 자책을 했다. 








추억을 회고하다 보니 떠오르는 기억.


러시아 횡단 열차..


처음엔 너무 추웠던 한 겨울에.

고통이 추억이 될 만큼 시간이 흘렀을 때는 한 여름에 또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날이 밝아오면 좁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나간다. 


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커피를 마시며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을 눈으로 이어나간다. 또 차를 한잔 마시고 내다보면 풍경은 변함이 없는 것 같은데 벌써 볕이 곱다. 


그리고 어느새 저 멀리 석양이 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겨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잔상 하나.


눈을 뒤집어쓰고 끝없이 펼쳐진 키가 훌쩍한 자작나무 숲의 밤 풍경은 가끔씩 무서웠다. 


몇 시간을 달려도 눈 덮인 자작나무 숲이 기차에 바짝 붙어 그냥 따라오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일 테지.







기차가 잠시 멈췄을 때 내려서 만난 시베리아의 겨울은 우리가 알던 겨울이 아니었다. 


지독히 매서운 추위는 머리를 얼게 만드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추웠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털모자 샤프카(Shapka)가 왜 필요한지를 저절로 깨달았다.








횡단 열차의 중간쯤에 있는 도시.


이르쿠츠크(Irkutsk)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깊이가 1,621m로 가장 깊은 바이칼 호수로 갈 수 있는 제법 큰 도시다. 

과거에는 정치범들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던 지역.








데카브리스트(Dekabrist)

1825년에 러시아 최초로 일어난 12월 혁명을 그렇게 부른다.


자신들의 모국 제정 러시아를 세계 제일의 국가로 착각하며 살았던 귀족 출신의 젊은 장교들이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하면서 다른 유럽 국가들의 문명화된 현실을 목격하고 전쟁터에서 돌아왔다.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러시아를 개혁하기로 결심하고 혁명을 도모한다.








그러나 음모는 발각되었으며 600여 명이 체포되었고 5명의 주모자가 교수형을 당한다. 


황제는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은 116명을 모스크바에서 4,200km나 떨어진 시베리아로 추방했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죄인이나 정치범들의 유형지였다. 


그들의 남은 삶이 비참하게 마무리될 거라는 생각은 당연한 일. 


그렇지만 한때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젊은 장교들에게 황제는 마지막 은전을 베푼다.


“결혼한 사람들은 부인을 데리고 떠나도 좋다. 단, 남편을 따라가는 여인들은 귀족의 신분, 재산, 명예를 모두 박탈하고 평민의 신분으로 시베리아에서 남은 생을 보내야 한다. “


백여 명 장교들 부인 중 사랑을 쫓아 남편을 따라나선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됐을까.






오래전에도, 또 그 오래전에도 여성들은 현명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나선 여인은 손꼽을 정도.


러시아의 수많은 재능 있는 예술가들- 소설가, 시인, 화가, 음악가, 연극인, 영화인, 심지어 발레에서까지 –이 이런 훌륭한 소재를 그냥 놔 둘리는 없을 터.


그들은 지고지순한 사랑을 쫓아 남편을 따라나선 소수 여인의 애처롭고 비극적인 삶을 글로 쓰고, 캔버스에 그리고, 무대에 올리고, 영화로 만들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이런 역사 속의 현장을 만날 기회를 가져다준다.


일정 내내 기차 안을 뛰어다니던 꼬마 친구.

젊은 부부가 홀로 된 아버지, 아이 둘과 함께 3대가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간단다. 장장 8일의 여정.

비행기 값은 너무 비싸고 서민이 타기에는 기차가 제 격이라고.







교장선생님을 끝으로 은퇴한 할아버지는 꼬마숙녀에게 과자 한 봉지, 사탕 몇 알을 건네주면 꼭 답례로 작은 것일지언정 먹을 것을 보내온다. 

예전의 러시아는 그만큼 넉넉한 예의와 자부심이 풍성한 국가였다는 듯.


할아버지 시대의 러시아는 과연 그랬었다.


또 한 번 횡단 열차를 타고 긴 거리의 기차여행을 하고 싶은 이 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구름 둥실한 파란 하늘과 푸른 숲,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밤이 되고, 또 새벽이 슬며시 찾아오던 기억을 쫓아..







고소한 프리첼과 보드카 두어 병이 곁에 있으면 일주일은 넉넉히 견딜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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