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한겨울인 12월 18일에 입대해서 태어나 처음 겪어본 양평의 모질고 매서운 추위가 ‘어서 와, 영하 32도는 처음이지!’ 라며 미소를 지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지내던 오래전 여름에 나는 대성리의 조그만 절에서 머물고 있었다.
지금이야 경춘선 도착역 춘천이 ‘휘익’하고 바람을 쐬러 가도 되는 지척에 있지만 그때만 해도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도착지인 춘천까지 4시간가량 걸리지 않았나 싶다. 그 중간에 대성리역이 있었고 나는 책 한 보따리를 메고 절에 들어갔는데 무슨 큰 뜻이 있어서라기보다 절에서 종일 책을 읽는다는 게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절은 청량리역에서 경춘선을 타고 대성리역에 하차한 후 큰길 국도를 건너 산을 두 개나 넘어가야 하는 깊은 산중에 있었다.
내가 들어가던 날 절의 객방 열 개는 비로소 모두 주인을 만났다. 나를 빼놓고는 모두 큰 뜻을 품고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이는 나중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결의문을, 또 어떤 이는 고향의 자랑인 자신의 입신양명의 의지를 책상 앞에 붙여두고 불철주야 책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절의 본 채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 왼쪽으로 각각 다섯 개의 공부방이 위치해 있었다. 절에는 특이한 인물들이 몇 명 있었다.
우선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도 십 년을 넘게 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시험 출제위원보다 더 깊은 학문적 지식을 갖고 있을 ‘왕형’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곳을 통치하는 권위자였다.
헌법에서부터 형법, 민법은 물론 면회법, 면회절차법 등 모든 법률과 규칙, 그리고 조약들이 그들의 의지대로 정해져 있었다.
‘음주는 토요일 저녁에 역 앞 가게에서 단체로 하되 (머리가 나빠질 가능성이 있으니 소주는 멀리하고) 맥주를 마신다.’
‘여친이 면회 올 경우에는 (배려심을 발휘해서) 기숙생은 산책길을 얼씬거리지 않는다.’
‘면회는 일요일에만 허용되며, 면회객이 가져온 모든 음식은 풀어놓고 같이 먹는다’ 등등 바깥에서는 민주공화국이 대통령의 뜻대로, 이곳에서는 ‘절 공화국’이 그들의 의지대로 통치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규칙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당시는 대통령도 서구식 민주주의의 교과서에서 얘기하는 절차와는 무관하게 뽑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 땅의 통치행위는 수도 서울에서든 대성리 산속에서든 격렬한 저항이 없는 한 그저 좋으면 좋은 대로 굴러가는 그런 세상의 끝 무렵이었다.
그러나 이들 왕형들을 굳이 종교적 권위를 갖지 않고도 고고한 자세로 내려다보며 군림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아마도 그는 주지승일 거야’라는 세간의 추측을 정면에서 날려버린 다름 아닌 ‘무심 법사’였다. 그녀는 50을 훨씬 넘긴 ‘절 집사’였다.
처음에 그녀의 겉모습이나 그녀가 흔히 써대는 언어 구사 능력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심 법사라는 법명을 가진 그녀와 상면 후 고개를 갸웃거린 것은 나 혼자만의 경험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절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아주머니였다. 동작이 크고 목소리도 굵고 우렁차서 도무지 산속에서 본성을 죽여 가며 평생을 조신하게 살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여인이었다.
채소뿐인 검소한 절밥에 늘 배고파하던 젊은 청년들인 우리에게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는 구세주의 음성이었다. 따라서 ‘언제나 종소리가 들리려나’ 노심초사하던 식객들은 배가 고플 때마다 ‘저 아주머니가 언제나 종을 치려나. 참 무심하기도 하네.’라며 탄식을 했는데 ‘무심’의 어원은 그렇게 만들어진 거라고 산책 중에 만난 또래의 법대생이 슬쩍 알려주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절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는데 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고독이나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서로 대화할 길이 없는 삭막한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밤마다 산기슭에서 들리는 외침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저 산 아래 계곡 어디쯤에서 야영객들이 내지르는 고함인 줄 알았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계속되는 소리에 나는 드디어 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소리의 진원지가 어디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러자 옆에서 식사를 하던 고참 하나가 내 다리를 툭 건드렸다. 식사 후 산책을 하면서 그는 이 절에 ‘대성리 타잔’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해주었다.
절에 들어온 첫날부터 조금 이상한 사람이 있긴 했다. 늘 하얀 런닝셔츠에 흰색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식사시간에 아무하고도 대화를 하지 않으며 산책도 늘 혼자 중얼거리며 다니던 사람. 사람들은 그를 타잔이라고 불렀다.
나이는 들어가는데 매년 시험에 떨어지고 결혼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트레스가 쌓여 저렇게 밤마다 소리를 지른다고 했다.
그 이후 나는 대성리 타잔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하루빨리 그가 시험에 털컥 붙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절의 ‘면회절차법’에 따르면 외부인의 면회는 일요일 하루에만 허용되었다. 따라서 결혼한 사람은 부인이 찾아왔고 성실한 고시생들은 아름답고 참한 여친들이 먹을 것을 싸들고 면회를 왔다. 나는 늘 그들이 부러웠다.
어느 날 초로의 할머니 모습을 한 분이 산길을 넘어 절로 찾아왔다. 머리에 큼지막한 보따리를 이고, 손에도 또 고만한 보따리를 든 모습이었다. 맨 걸음으로 산 두 개를 넘어오는 것도 힘들 텐데 할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왔을 게 분명했다. 몇 차례나 땀을 식히며 올라왔을까 안쓰러웠다.
규칙에 따라 점심 식탁에 면회객이 가져온 음식이 펼쳐졌는데 그날은 마침 할머니가 유일한 면회객이었다. 멀리 남쪽 지방에서 밤새 기차를 타고 새벽에 청량리에 내린 할머니는 다시 경춘선을 갈아타고 대성리역에 내려 두어 시간 산행을 했던 터라 식탁에 앉아서도 연신 땀을 닦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할머니는 몇 가지 종류의 떡을 가져왔는데 배고픔을 이기는 데는 떡이 제일이라고 말씀하면서도 음식의 소홀함을 부끄러워하셨다. 할머니는 타잔의 모친이었다.
쑥떡, 찰떡, 시루떡.. 참 먹음직스러웠다.
가져온 떡을 무심 법사가 우리들 접시에 조금씩 나눠 놓았는데 할머니 옆의 아들의 접시는 빈 채로 남아있었다. 막 먹으려던 우리는 의아해했다.
“왜 아드님 접시는 비어있습니까?”
왕형이 묻자 할머니는 허리춤을 풀었다.
허리춤에서 길게 두른 보자기가 나왔는데 그 안에서 할머니는 비로소 고소한 향기가 나는 인절미를 꺼냈다. 몸의 온기로 아들 먹일 인절미를 마지막 순간까지 따뜻하게 보관했던 것이다. 열혈 청년들이었던 우리지만 모두 가슴이 짠했고 코가 찡해졌다.
할머니는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음식을 먹이고 싶었던 것일까? 산을 넘어오며 몸은 얼마나 더웠을까?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은 그런가 보다.
절을 내려온 이후에, 또 군대에서도 나는 시험 합격자 발표가 나는 날에는 타잔의 이름을 확인하려 애를 썼다. 오랜 기간 그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제는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사랑이 지극하던 그의 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셔서 자식의 효도를 받고 계실까?
할머니가 가져온 떡을 먹은 날도, 그리고 이후에도 타잔의 외침을 산속에서 오랫동안 들을 수 있었다. 간혹 규칙을 일탈하고 싶은 날에는 혼자 산길을 내려가 술을 마시고 올라오곤 했는데 올라오는 길엔 밤하늘을 보며 ‘별이 빛나는 밤에’ 노래를 부르곤 했다.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운 오늘 같은 날, 별이 빛나던 대성리 하늘을 쳐다보며 절규하던 타잔과 그 어머니의 진정한 사랑을 추억한다.
(사진은 여행 중에 촬영한 것으로 글 배경과는 무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