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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Oct 31. 2021

혹시, 커피를 좋아하세요?


젊은 시절,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비장한 마음으로 부모님께 큰절을 하고 유학을 떠났다. 그 당시만 해도 한번 공부하러 떠나면 공부를 마쳤을 때나 귀국하는 걸로 알던 시기였으니 내 비장함은 나름 그럴듯했다. 그런데 그 이듬해 나는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했다.


첫해에는 영어공부를 하고 이듬해 마침내 학교에 입학을 했고 기숙사를 배정받아 불철주야 공부를 했다. 사실 그거 말고는 할 게 없었으므로 남들이 봐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학교 안에 바(bar)도 있고 학생 홀은 밤에 클럽으로 바뀌어 유명, 무명의 밴드들이 매일 찾아와 라이브 공연을 했으니 지금 우리에게 꽤 익숙한 유명한 밴드들은 캠퍼스 안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공부만 했다. (입증할 셀카 사진 한 장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영국의 대학은 3학기 제로 대개 9월 말에서 10월 초에 새 학년 개강이 시작되어 12월 초 중순 무렵에 크리스마스 방학이 있고, 다시 2학기 개강을 하여 3월 하순경 부활절 방학을 갖는다. 그리고 2주 후 다시 마지막 학기를 개강하여 학기말 시험을 끝으로 6월 초에 3개월이 넘는 긴 여름방학에 들어간다.





내가 굶어 줄을 뻔했던 시기는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어 대부분 영국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유럽에서 온 학생들도 비가 자주 내리고 우중충한 런던에 머무느니 다들 고향으로 떠나버려 한적한 외곽에 떨어져 있는 기숙사에는 멀리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몇몇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이미 전 해의 경험이 있었던지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모두들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따라서 그 큰 기숙사에 나만 남게 되었다. 나도 나름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보내고 싶어서 런던 시내로 나가든지 아니면 맛있는 음식을 잔뜩 구해놓고 널찍한 기숙사에서 편안히 쉬며 밀린 책이나 봐야겠다고 나름 계획을 짜두었다.


음식은 크리스마스 임박해서 사둬야 싱싱할 테니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고, TV는 혼자 보는 거나 마찬가지니 ‘007 시리즈’를 제대로 보기로 했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크리스마스 무렵엔 007 시리즈를 방송국마다 거의 처음 것부터 재방, 삼방을 거듭해 보여준다). 나름 야무진 계획을 세운 것이 뿌듯했다.


묵은 음식은 23일로 다 끝내고 다음 날 오전 동네 큰 슈퍼 체인인 TESCO로 갔다. 그런데 가는 길이 조금 이상했다. 길거리에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았다. 길거리는 조용했고 버스는 물론 승용차들도 보이질 않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도착한 슈퍼마켓도 문이 닫혀 있었다. 넓은 주차장에 차 한 대 보이지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신문을 파는 구멍가게들이 있는데(영국에서는 인건비 때문인지 신문을 배달하는 제도가 없어 대부분 사람들은 매일 동네 가게나 역 앞 신문 가판대에서 매일매일 신문을 구입해서 읽는다) 거기도 죄다 문이 닫혀 있었다.


마침내 깨달은 사실..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모두가 겨울잠을 자듯이 숨죽이고 가족끼리 지낸다는 것. 우리와 너무 다른 풍경이다. 가게, 은행, 병원들은 모두 문을 닫고 버스, 전철 등 교통수단도 모두 운행하지 않는다. 그들도 모두 크리스마스를 즐겨야 했으므로. 혹시라도 그 무렵에 아프면 정말 더 큰일이 벌어진다.

 

게다가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26일은 ‘Boxing Day’라고 해서 예전 봉건시대 영주들이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에 옷이나 곡물들을 평상시에 부리던 하인이나 농노들에게 박스에 넣어 선물하면서 하루 동안 휴가를 주었던 전통에서 유래하는 공식 휴가제도가 있다. 우리도 최근에 억울하게 휴일을 까먹는 걸 보상하는 그런 제도가 생겼지만..





할 수 없이 빈손으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문제는 먹을게 빵 한조각도 없다는 현실.

그날부터 사흘 밤 나흘 낮 동안 생존을 위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다들 떠난 기숙사에는 남아있는 사람도 음식도 없었고 유일하게 남은 건 커피 한 병뿐(그때는 병 안에 든 맥심처럼 농축된 알갱이 커피를 끓는 물에 타 먹는 게 커피 마시는 방식이었던 걸 기억하는 분이 있을 거다).


혹시 커피로 10끼를 해결하면 어떤 증세가 생기는지 경험해 보신 분이 있으신지. 첫날은 그런대로 분위기 있었다. 총총한 눈빛이 여전한 게 윌리엄 워즈워드가 된 듯 시상도 떠오르고 셰익스피어가 된 듯 장편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휘감았다.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인지 독서도 제법 진도가 나갔다. 이튿날에는 속이 살짝 쓰리며 정신도 이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흘째에는 손이 떨리는 증세가 나타나면서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내 인생이 조금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다. 만일 아사라도 하면 영국의 신문과 방송에서 동양에서 온 가난한 학생이 기숙사에서 굶어 죽었다고 보도할 텐데 그럼 얼마나 부끄러울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때 만일 아프리카에서 온 여학생이 바나나 한 조각이라도 내게 주었다면 아마 지금쯤 나이지리아 저 시골마을 족장의 사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운명은 그만큼 얄궂은 것이니..





마침내 27일 오전,

거의 탈진 겸 기절했다가 일어나 동네 빵가게가 문을 열 시간에 제일 먼저 들어가 막 구워낸 스콘을 덥석 베물어 먹고 우유를 듬뿍 넣은 잉글리시 커피를 마시며 걸어오는데 갑자기 마음이 짠해졌다. 그다음 해부터는 내가 얼마나 요란을 떨었는지 짐작이 되실 거다. 


어쩌다 오후 간식이 커피와 스콘 한 조각이 되었다.

훌륭한 사람은 못되었지만 그래도 주말 오후 이런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두고두고 커피를 사랑할 작정이다. 그까짓 사흘 굶은걸 갖고 요란을 떤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겠지만 생각해 보시라. 어둠 속에서의 고독은 더 무서운 법이고 외로움 짙은 가을의 고독은 더 사무치는 법이다.


코로나가 풀리면 루앙프라방으로 날아가 멀리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막 구운 바게트 빵에 막 내린 커피를 몇 잔쯤 마실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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