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생 전쟁을 벌이며 살았다.”
영국 의회정치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로 쇠퇴해 가던 영국을 구해낸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고백한 말이다.
잉글랜드 중부의 작은 도시 그랜섬(Grantham)에서 잡화상의 둘째 딸로 태어난 대처는 근면과 절약에 대한 가치를 부친으로부터 배웠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화학과 법학을 전공하였으나 졸업 후에는 정치에 뜻을 품게 된다.
1950년 처음으로 총선에 출마해 낙선한 이후 34세인 1959년 보수당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의회에 진출, 1970~74년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1975년에는 첫 여성 보수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1979년에는 마침내 첫 여성 총리가 된 이래 만 11년 기간 동안 영국을 이끌며 고질적인 ‘영국병’에서 국가를 회복시켰다.
대처는 도덕적 보수 철학과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이념을 바탕으로 우리에게는 ‘대처리즘(Thatcherism)’으로 익숙한 통치철학으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국가를 운영했다.
총리로 취임한 초기에 그녀가 직면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질적인 ‘영국병(British Disease)’을 치유하는 문제였다.
1970년대 영국은 막강한 노조의 영향력으로 인한 지속적인 임금 상승, 생산성의 저하와 과도한 복지정책 등으로 경제가 침체하고 고비용과 저효율, 그리고 과도한 복지 등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영국병에 시달렸다.
그 결과 영국은 1976년 우리에게도 익숙한 IMF의 금융지원을 받는 상황을 경험한다. 여기에는 노동당 집권 기간 동안 정부의 지원을 업고 권력 세력으로 무장한 강성 노조의 역할이 컸다. 게다가 대처의 집권 직전인 1979년 초에 영국 사회는 공공부문 노조의 파업으로 학교, 병원, 공항 등이 전면 마비되는 일까지 발생해 시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대처는 1979년 집권하자마자 고질적인 영국병의 치유를 위해 저비용과 고효율로의 획기적인 경제구조의 전환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자유시장 경제원리를 중시하는 경제를 포함한 사회 전부분에 걸친 과감한 개혁에 착수한다.
대처는 노동법을 개정해 노동시장을 개혁하는 한편 대표적인 강성노조인 탄광노조의 장기간에 걸친 파업에 물러서지 않고 원칙에 입각해 처리했다. 1년여의 오랜 싸움 끝에 결국 광산노조와 인쇄노조가 파업에 실패하면서 영국 헌정과 정치제도에 대한 노조의 위협이 사라지게 되었고 국가발전의 커다란 장애물이었던 영국병 또한 치유되는 계기가 된다.
노조의 불법 관행이 줄어들고 다양한 산업부문에서 초과인력이 감소하자 생산성은 향상되었고 자연스럽게 영국 경제는 유럽의 경쟁 국가들을 추월하며 급속도로 성장한다. 대처는 또한 불필요하게 과도한 공무원 숫자를 75만 명에서 64만 명으로 줄이는 한편 50여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작업도 병행 추진하면서 경제와 사회의 효율성을 도모하였다.
단지 성공적인 정책의 결과만을 놓고 대처를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가의 지도자로서 그녀가 어떤 자질을 갖추었는지 또 어떤 자세로 국가를 이끌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임기 초반 그녀가 마주한 영국의 강성 노조는 이전의 헤럴드 윌슨(H. Wilson) 노동당 내각(1964~70, 1974~76), 에드워드 히스(E. Heath) 보수당 내각(1970~74), 그리고 제임스 캘러헌(J. Callaghan) 노동당 내각(1976~79)을 붕괴시킨 전력이 있는 비민주적이고 비합법적인 파업을 일삼던 영국병을 유발한 주범이었다.
이들은 과격한 파업투쟁을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도 서슴지 않았다. 대처는 전임자들처럼 이에 굴하지 않고 법원과 경찰력을 동원해서 오랜 싸움 끝에 불법적인 노조활동을 분쇄했다.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한 신념은 무엇이었을까?
‘대처리즘’은 그냥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통치철학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이론적인 무장을 단단히 했다.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을 동반하는 자유, 법의 평등 원칙과 자유방임적 시장경제를 주장한 아담 스미스(A. Smith)의 《국부론》과, 《자유론》의 저자 밀(J. S. Mill), 그리고 《법, 입법, 자유》와 《노예의 길》을 집필하고 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한 하이에크(F. Hayek)가 계승한 영국 고전 경제학파 이론의 단단한 뿌리가 바탕에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철학을 바탕으로 대처는 주목받는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은 1983년과 1987년 연이어 총선거에서 승리하였고 1990.11.20. 그녀가 총리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지도자로서 영국의 국가적 자존심과 자부심을 회복시켰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의회정치 현장에서 단호한 리더십으로 국가를 이끌었으며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대처의 통치 방식과 대처리즘은 1980년대 세계적으로 영향을 떨치게 되는데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공유하며 긴밀한 협력관계 속에서 이념갈등으로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체제경쟁을 벌이던 소련 제국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녀가 신념으로 무장하고 지향했던 ‘바람직한 보수주의’ 정치란 무엇인가?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은 기존의 전래된 관습, 전통 생활방식, 법률 등 기존의 모든 사회제도를 갈아치우고 새로운 이상주의적인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정치인이자 정치 사상가였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1729~1797년)는 유토피아적 혁명은 공포와 독재를 불러일으키며 기존 질서의 파괴와 혼란만을 초래할 뿐이라며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실제로 프랑스혁명 전후의 혼란은 버크의 사상적 배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은 버크가 저술해 프랑스혁명 발발 이듬해인 1790년 11월에 출간한 소책자이다. 인류의 지성사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혁명에 대한 비판서이자 근대 보수주의 사상의 토대를 마련하고 기여한 책자로 평가된다. 이 책자에서 드러난 버크의 사상은 이후에 20세기 보수주의와 고전 자유주의 지식인들에 큰 영향을 미쳐 공산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논거로서 활용되기도 한다.
대처리즘은 근대 보수주의의 등장에 기여한 버크의 사상에 아담 스미스, 존 밀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주장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이론적 토대로 대처 통치철학의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집권 기간 여하한 정치 상황일지라도 분명하게 판단하고 단호하게 추진할 정책 마련과 집행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한 나라의 정치 지형뿐 아니라 전 세계를 변화시킨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그렇지만 만 11년의 재임 기간 동안 그녀는 국민들로부터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으로 인해 당내 외는 물론 국민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고 야당인 노동당과 특히 노동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로부터 공공연하게 ‘노동자의 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산업부문의 민영화 추진, 무상급식 문제, 경제난과 양극화 심화, 스코틀랜드와의 갈등, 인두세(poll tax) 도입으로 인한 충돌 등은 그녀를 실패한 정치인으로 평가하는 집단에서 흔히 제기하는 문제들이다. 게다가 그녀는 보수당 내 측근들의 반발로 현직에서 물러난 첫 총리라는 불명예도 동시에 가졌다. 당시 적국이었던 소련으로부터 얻게 된 ‘철의 여인(The Iron Lady)’이라는 별명은 오로지 소련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가 산업의 경쟁력을 키워 영국 경제를 다시 도약시키고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를 위한 비전을 충실하게 실행하며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냉전을 종식하고 1980년대 신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주도하며 영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기여한 점에 대해서는 주목할 만한 평가를 받는다. 대처는 영국 정치사에서도 영국 국민은 물론 전문가와 정치인들로부터 전쟁을 승리로 이끈 처칠(W. Churchill)이나 2차 대전 이후 영국에 본격적인 복지체계와 사회보장제도를 수립해 국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한 클레멘트 애틀리(C. Attlee) 총리들과 비견할만한 수준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대처를 묘사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올바른 제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
거대한 이익집단에 당당하게 맞서는 용기.
위험을 감수하는 결단력.
복잡한 상황 속에서 핵심을 찾아내는 명석함."
2013년 그녀가 87세를 일기로 뇌졸중으로 사망했을 때 당시 캐머런(David Cameron) 영국 총리는 이렇게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총리,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
사진출처 ;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