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어릴 적 학교에서 만난 소사 아저씨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다.
이름도 모르고 출신이나 배경도 모르는 아저씨였지만 아저씨는 늘 우리에게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아저씨는 여자애들을 기겁하게 하는 머리에 떨어진 송충이를 손으로 툭 털어 울음을 그치게 하거나, 넓은 운동장을 싸리비 한 자루로 훌훌 쓸어버려 못 하나 밟히지 않게 했다.
또 70명이 넘는 우리 반 시험 문제지를 교실까지 시간에 맞춰 가져다주기도 하고, 가끔씩은 손에 들고 있던 딱딱한 옥수수 빵도 웃으며 떼어 주셨다.
다만 아저씨가 한 일 중에 아쉬웠던 것 하나가 있었다.
아저씨는 왜 구렁이를 죽여 우리가 소풍을 갈 때마다 비가 내리게 했는가 하는 점이다.
‘아저씨는 학교 어디에서 구렁이를 만났던 것일까.’
‘아저씨는 그 큰 구렁이와 싸워 어떻게 이겼을까.’
‘만일 아저씨가 싸움에 졌으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칠 때면 우리는 학교 뒤쪽의 청소 처리장에서 아저씨를 만나더라도 경외심을 가지고 저절로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지금 우리는 제법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피곤하고 힘들게 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가만히 뜯어보면 사실 대단한 인물도 아닌데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 자리에도 앉아 있다.
경쟁력이 없는 인물들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 먹고사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을 피곤하고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목소리만 요란하다.
가을이 깊어 간다.
커피를 앞에 놓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단풍이 들어가는걸 바라보는 모습은 늘 그리운 법이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하다.
이제는 우리도 다 자라서 누군가에게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야 하지만 요즘 같은 날은 소사 아저씨가 종종 그립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재잘대는 아이들을 지켜주기 위해 밤새 구렁이와 사투를 벌여 간신이 이겨낸 아저씨의 그 든든한 모습은 어디를 가야 찾아볼 수 있을까..
(소사(召使)는 일본어로 남의 집 살이 하는 머슴이나 하인을 표기하는 단어를 한자로 읽은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