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의 인연은 햇볕에 벌겋게 익은 듯 보이는 손을 내 앞에 조심스럽게 내밀며 휴대폰의 글씨를 읽어보라고 요청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가려고 합니다. 좌석이 있으면 우리를 태워줄 수 있나요?”
마침 좌석이 비어 있어서 나는 흔쾌히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외국인이 휴대폰 번역기를 통해 의사를 물어온 것도 이채로웠고 한반도 분단을 실감 나게 확인할 수 있는 저만치 북한 땅이 보이는 고성까지 찾아온 것도 놀라웠다.
툰(Toon)과 다이애나(Diana)
부부인 그들은 네덜란드에서 고성을 찾아온 여행객이었다.
놀라운 일은 그들이 속초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나와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요청을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휴대폰을 읽어보지도 않고 손사래를 쳤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예민해서 그럴 거라고 그들은 스스로 이해했다.
“여기 고성까지는 왜 왔어요?”
내 물음에 그들은 한국의 분단 현실을 확인하고 싶어서라고 답을 했다. 하긴 그리 멀지 않은 맑은 모래 해안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명사십리이고 그 뒤 산자락 끝이 해금강이니 여기서 북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분단의 현장을 실감 나게 느낄 것이다. 그들은 오백 원짜리 동전을 몇 차례나 넣어가며 망원경으로 북한 땅 이쪽저쪽을 살펴보았다.
툰은 독일에서 2년간 군인으로 복무하기도 했다고 했다.
‘유럽통합군 소속이었나.’
그래서 독일 통일을 생각하며 우리의 분단 상황이 궁금했었나 보다.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승만 별장과 김일성 별장이 지척에 있다는 사실을 의아해했다. 그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기 위해 3년여 기간의 6·25 전쟁을 설명해야 했다. 견고하고 단단하게 돌로 건축한 김일성 별장이 화진포 바닷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반면에 소박하고 아담한 느낌을 주는 단층의 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호숫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실이 이채로웠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서울까지, 그리고 서울에서 속초까지 여행하는 그들의 자전거 세계여행은 벌써 3년이 넘게 지속된 일정 중의 하나라고 했다.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는 러시아와 몽골을 거쳐 중국을 여행했다고 했다. 유럽은 물론 북미와 중남미도 이미 둘러보았다고 했다. 우리 나이로는 각각 68세와 56세로 띠동갑인 부부는 건강해 보였다. 피곤한 여정이었을 텐데도 그들은 시종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그들은 낯선 나라를 자전거로 여행하며 이국적인 풍경을 마주하고 생경한 음식을 먹으며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그들에게 관광지 간이 편의점에서 호떡과 호박 식혜를 간식으로 대접했다.
모두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고 했다. 낯선 곳에서 음식을 가려먹는 습관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고 다이애나가 웃으며 말한다. 호떡은 달달함과 칼로리로 인해 자전거 여행자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소박하게 음식 평을 했다. 그들은 내게 맛있는 커피로 감사를 표했다.
뜨거운 여름, 그들은 한국의 무더위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서울에서 속초로 오는 도중에는 폭우가 쏟아져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했다. 바로 얼마 전에 우리나라를 강타해 기상청 기록을 남긴 그 시간에도 그들은 경기도인지 강원도쯤인지 모를 낯선 시골길을 비가 잠잠해질 때마다 자전거로 달렸다고 했다.
6·25 참전국 중의 하나인 네덜란드.
유럽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 1천7백여만 명에 국토 면적은 4만 1,543㎢이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대표적인 저지대 국가로 동부와 남단부에 약간의 구릉지가 있으며 남동단의 최고부가 322.5m에 불과하다.
네덜란드는 역사적으로 인접 국가들과의 오랜 전쟁 속에서도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도모했다. 그들에게는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적인 DNA가 흐르고 있는지 모른다. 특히 1588년 독립한 이후 1602년에는 동인도회사, 1621년에는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 아프리카는 물론 북미까지 진출한 바 있다. 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식민지로 점거하였으며, 일본에서는 1600년 네덜란드 상선이 표류하던 중 도착하게 된 사건을 계기로 1641년에서 1855년까지 나가사키를 기지로 한 양국 간 활발한 무역 활동을 지속했다. (네덜란드의 지원으로 일본은 근대화의 물결에 본격적으로 편승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영국, 스페인 및 포르투갈 등과 식민지 경영을 놓고 여러 차례의 전쟁을 겪기도 하였다.
네덜란드는 한국전쟁 참전 16개국의 일원으로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지지해온 전통적인 우방국이다. 1949년 7월 25일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1950년 7월 보병 1개 대대, 함정 1척의 규모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1961년 4월 4일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였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국민의 평균 신장이 가장 큰 민족이며 국토 면적이 작은 나라답지 않게 세계적 경제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강소국이다. 그들은 전 세계에서 경제, 금융, 문화, 예술,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다.
우리나라를 2002년 월드컵 4강으로 이끌었던 네덜란드 출신의 거스 히딩크는 늘 도전적인 삶을 살았다. 한국팀을 이끌던 감독 시절에 자신은 늘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던가. 히딩크는 우리나라는 물론 두 차례에 걸쳐 네덜란드 국가대표팀과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 터키, 퀴라소 등에서 국가대표 감독 생활을 했다. 중국에서는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그에게 모국 네덜란드는 너무 좁게 느껴졌을까. 너무 식상한 얘기가 될까 봐 그들과의 대화에서 히딩크의 이름은 꺼내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부터 369년 전인 1653년(효종 4년)에 난파선에 몸을 실은 채 제주도 해안에 상륙해 14년간 난민으로 체류하다가 탈출하여 표류기를 통해 우리나라를 처음 세상에 알린 하멜(Hendrik Hamel)도 네덜란드인이다.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의 선원으로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으며 긴 억류 생활 끝에 1666년에 조선을 탈출하여 1668년 귀국했다. 하멜표류기는 그의 억류 생활 14년간의 기록으로서 조선의 지리·풍속·군사·교역·정치·교육 등의 실상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하멜이나 히딩크의 삶을 반추해보니 네덜란드 사람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짐작할 만하다. 그들에게는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무한 도전하려는 의지가 넘치는 DNA가 있는가 보다. 그런 DNA가 있어서 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면서 지치지 않는 것일까? 그들을 바라보며 (내가 알만한) 그들 나이 또래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우리는 어떤 민족일까.
요즘 젊은 세대는 많이 달라졌지만, 역사적으로 우리는 지정학적 한계로 인해 대륙을 거쳐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만주 벌판을 내달리며 기상을 떨치던 일은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전설 같은 역사로 남았다. 환경으로 인한 고립된 의식이 외국과의 교류나 문물의 수입과 활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드물게 찾아온 외국과의 문물, 문화, 종교의 교류 기회를 빗장을 걸다시피 국가의 문을 닫아버리는 쇄국으로 대외정책의 근간을 삼기도 했다.
시기에 적절한 정책이었는가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이런 배경이 우리네 사고의 바탕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인식이 깊숙이 자리 잡도록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광저우를 방문했던 동생은 세 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중국인 친구로부터 차 한 잔 마시러 잠깐 들르라는 전화를 받고 아연실색한 적이 있다고 했다. 생각의 차이가 국토의 면적과 결코 같지 않음을 네덜란드 국민들을 보며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속초에서 부산으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물론 자전거를 타고.
그 후에는 코로나로 인해 개별입국을 허용하지 않는 일본과 대만을 포기하고 멀리 필리핀으로 갈 계획이라고 했다.
헤어진 다음 날 나는 서울로 왔고 그들은 부산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아마 동해의 바닷바람을 몸으로 맞아가며 강릉을 지나 부산을 향해 힘차게 달리고 있을 것이다. 바닷바람의 기억을 마무리하고 내륙에 들어가 천년 고도 경주쯤에서는 영어를 말하는 누군가를 만나 황남빵에 커피를 대접받으며 그들의 조상 하멜의 경험과는 다르게 평생 가슴에 담을 달콤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듬뿍 채워갔으면 좋겠다.
ps : 그들은 가는 곳곳마다의 관광지에 영어로 번역된 안내문이 없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고성 통일전망대에도, 또 그전에 들러야 했던 안보전시관의 영상 교육에도 영어 안내문이나 영어로 된 자막은 없었다. (안보전시관의 동영상은 일 년에 백만여 명이 통일전망대를 찾는다고 자랑했다). 간성에서 속초로 들어가는 하루에 세 차례만 운행한다는 버스에 대한 정보도 잘못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마터면 간성에서 속초에 있는 그들의 숙소까지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30여 km를 걸어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