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는 눈물을 잘 흘렸다.
어릴 적 TV 드라마를 보다가도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물을 흘리며 “아빠는 안 울어?” 하며 작은 손가락으로 내 눈을 열어보곤 했다.
“이상한데. 아빠는 안 슬픈가 봐.”
영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한 살 무렵부터 공부하던 아빠와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던 엄마의 손을 떠나 매일같이 외국 사람들의 손을 오가며 컸다. 귀국 후 어느 핸가 가만히 세어보니 12명의 child minder (혹은 nanny라고도 부른다)의 돌봄을 받은 것을 깨달았다.
영국 아줌마, 프랑스 아줌마, 모리셔스에서 온 아줌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아줌마, 인도 아줌마, 파키스탄 아줌마, 자메이카 출신의 아줌마, 한국교포 아줌마, 연변에서 온 아줌마, 중국 아줌마.. 5살에 학교에 들어가기까지 이런 일상이 반복되었다.
아이는 아침마다 남의 집에 가야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이는 차를 몰고 아줌마 집으로 가는 길모퉁이에서부터 눈물을 쏟곤 했다. 겨우 한 살이 넘어 말도 못 하는 아이는 작은 손으로 아빠의 목을 꽉 붙들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힘들게 그 손을 풀어 낯선 이의 손에 아이를 건네주곤 했다.
아이와 함께 기저귀 가방을 넘겨주며 나는 늘 아이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변이 마려우면 아줌마에게 ‘푸(poo)’라고 얘기하고, 쉬하고 싶으면 ‘위(wee)’ 그래야 해.
아빠가 일찍 올게.”
우는 아이가 그런 말을 새겨들을 리 없지만 기저귀 갈아주는 것을 귀찮아하는 사람들에겐 아이의 실수가 용납되기 어려웠다. 한국어와 영어 모두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던 아이는 자주 실수를 했다.
수업이 일찍 끝난 어느 날,
나는 아이를 반갑게 놀라게 해 주려고 서둘러 갔다.
집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가 까꿍을 하려던 나는 방 한쪽 구석에서 작은 주먹을 입에 물고 혼자 울며 서있는 아이를 보았다. 실수를 하고 벌을 받는 것인지, 무서워서 스스로 구석에 가서 서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를 바짝 껴안고 속으로 울었다. 그런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귀국해서 아이는 한국 학교에 전학을 했다. 8살에 입학하는 한국과 달리 영국에서 5살에 입학했던 아이는 3학년을 다닌 기록이 있어 저보다 2살이나 많은 아이들과 공부를 해야 했다. 아무래도 따라가는 게 힘들 것 같아 한 살 더 많은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2학년으로 전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학교에서 유명해졌다.
학교 전체를 통틀어 구구단을 모르는 유일한 아이로.
선행 학습까지 마친 똘똘한 한국 아이들은 2학년인데도 전후좌우라는 한국말도 이해 못하고 구구단도 모르는 아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쑥 햄스터를 가져오기도 하고 병아리를 들고 오기도 했다. 자기를 놀리지 않고 가장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들을.
가끔 제 방에서 아이가 키우는 강아지를 침대 위에 뉘어두고 작은 막대기를 들고 혀 짧은 소리로 혼내는 모습을 보곤 했다.
“너 이렇게 공부를 못하면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래. 응?‘
내가 아이에게 하던 바로 그 소리였다.
어느 날인가는 담임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의아했다.
“아이가 영어는 잘할 줄 알았는데 영어 시간에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네요?”
그날 밤 왜 그런지를 아이에게 물었다.
“애들이 영어를 이상하게 말한다고 놀려.”
미국식 영어에 익숙한 친구들이 아이의 탁한 영국식 영어 발음이 이상하다고 놀려댄 것이 원인이었다. 늘 자신이 없던 아이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줄로 알았다.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아팠다.
이런 배경 탓인지 아이는 성장하면서 늘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이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늘 가슴 아파했다.
세상에 공짜로 얻는 것은 없다는데 아빠로 인해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소소한 사연으로 딸아이에 대한 나의 감정이 이럴진대 세상의 아빠들은 딸아이와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있을까 싶다.
처음 아빠라는 말을 내뱉던 날.
아이가 긴장한 얼굴로 학교에 처음 입학하러 가던 날.
작은 손으로 연필을 들고 글씨를 쓰려고 애를 쓰던 모습.
대학생이 되어 제법 어려워 보이는 책을 들고 다니던 예쁜 모습도 이젠 추억이 되었다.
딸아이에 대한 잔잔한 추억이 하나씩 생각날 때마다 남자의 삶의 연륜도 늘어난다.
이런 추억들을 가슴에 품으며 남자들은 딸 바보가 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