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공간
삼성 그룹 이건희 회장님이 두바이를 다녀가신 후 기업 총수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지금은 여행지로 알려졌지만, 그 당시엔 벤치마킹과 사업기회를 엿보려는 방문이 많았다. 덕분에 나는 그룹사 회장님과 사장님, 정치인을 만나 가이드를 했다.
설 연휴를 이용해 두바이에 온 회장님 가족이 있었다. 부부와 아이들, 비서 두 분이 일행이었다. 다른 회장님과 달리 이 가족은 최고급 호텔인 버즈 알 아랍이 아니라 고풍스러운 알카사르 호텔에 묵었다. 여전히 비싼 호텔이지만 버즈 알 아랍에 비하면 삼분의 일 가격이다. 비서의 말에 의하면 사모님의 선택이었다고 한다.
화려함과 과시가 아닌 분위기와 실리를 택한 것이었다. 알 카사르 호텔은 5km 인공 수로를 따라 작은 배 아브라가 오가는, 아랍 궁전을 느낄 수 있는 차분한 리조트다. 은은한 조명과 조용한 아브라의 움직임, 양쪽의 야자수 나무, 모래 빛 건축이 어우러진 그곳에서, 호텔 분위기 때문인지 이 가족은 너무 차분하다.
이동하는 동안에 설명하면 아이들과 아빠는 신경을 안 쓰지만 사모님은 내 이야기를 유심히 들었다. 말을 끊지 않고 듣고, 질문한다. 특히 셰이크 모하메드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셰이크 모하메드 주도의 두바이 발전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없나요?”, “아부다비는 두바이 발전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지도자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미나 바자르(재래시장)를 지나가다 버스에서 내려 걷고 싶다고 했다. 가족들은 버스에 남아있고 비서 두 명과 내가 동행을 하며 시장을 걸었다. 상인들이 여기저기서 “언니, 언니” “싸다 싸!”라는 말을 한다.
사모님은 여유롭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오토바이 점퍼 하나를 골랐다. 검은색 인조 가죽에 노란색 라인이 있고, 큰 숫자가 팔과 등에 쓰여있는 옷이다. 지퍼가 많이 달린 허리가 잘록한 디자인으로 가격은 7만원이었다. 날씬한 분이라 입어보니 어울렸다. 예상 밖의 선택이었다.
사모님이 사겠다고 하고 앞으로 걸어가면 비서가 돈을 지불한다. 돈 많은 분들의 특징은 본인이 직접 지불하지 않는 것이다. 사모님이 걸음을 멈출 때마다 비서와 나는 자동으로 갑자기 멈춘다.
두바이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바스타키아로 향했다. 황토집에 솟은 바람탑들, 하얀 벽의 이슬람 사원,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마지막에 ‘마즐리스 갤러리(The Majlis Gallery)’에 도착했다. 갤러리를 들어가려고 하자 회장님과 아이들은 덥다며 버스로 간다.
마즐리스 갤러리는 낡은 아랍 가옥을 개조해 만든 두바이 최초의 화랑이다. 영국 출신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예술가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 시작했다는 설명을 했다. 그 설명을 들은 사모님은 “공간이란, 이렇게 쓰여야 하는 거죠, 좋네요.”
버스 안으로 돌아오니 회장님과 아이가 장난을 치고 있다. 회장님과 어린 막내가 노는 모습이 정겹고 미소가 절로 나온다. 사모님은 무심한듯 다른 좌석에 앉아 창밖을 본다. 가까이 가면 웬지 혼날 것 같은 분위기이다.
화랑에서 공간의 쓰임을 이야기하던 사모님의 말이 떠올랐다. 가족의 공간은 어떻게 쓰여야 할까? 이야기나 웃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 마음이 편안한 공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날 버스 안에서 본 가족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공기를 마시는 듯했다.
함께 여행했지만, 서로 다른 풍경을 기억하게 될 사람들. 버스 안에서 아이처럼 웃던 회장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곁에 사모님까지 미소 짓고 있었다면, 완벽한 가족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스스로 외로운 사모님께 뜨거운 두바이의 열기와 생기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