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돌아오는 길
16장 ― 돌아온다는 것
여권을 꺼내는 손이 어색했다.
자동 출입국 심사대를 지나면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낯익은 말인데,
어딘가 너무 정중해서
그 말이 내게 온 게 아니라
시스템에서 흘러나온 음성 같았다.
공항 밖,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부드러웠다.
서울은 습하고 흐렸고,
도로는 막혔다.
택시 기사님은 내 이름을 두 번 물었고
나는 같은 어조로 두 번 대답했다.
창밖에선
고층 아파트와 프랜차이즈 간판들이
겹겹이 쌓여 지나갔다.
어디선가 봤던 도시 같았다.
회사 건물에 도착했을 때,
출입증이 문제였다.
이름도 등록도 다 되었지만,
시스템이 멈춰 있었다.
“잠시만요. 서버 재부팅하고 다시…”
안내 데스크의 말이
어딘가 상징 같아서,
나는 웃지 못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회의실은 무채색이었다.
사람들은 무표정했고,
명함엔 한글 이름과 직책이 또렷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내가 일본에서 오기 전,
미국에서 떠나오기 전,
머릿속에 그려두었던
“한국으로의 복귀”라는 문장은
생각보다 훨씬 두꺼운 침묵 속에 있었다.
나는 귀국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다른 말투, 다른 시차를 안고 도착한 또 하나의 방문자였다.
서울은
내 고향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가장 잘 알지 못하는 도시 같았다.
17장 낯선 익숙함
말은 통했다.
그러나,
말이 통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멀게 만들었다.
회의 시간,
내가 낸 의견에
“맞는 말씀이시긴 한데요…”로 시작하는 반론이 돌아왔다.
그 말의 끝은
언제나 내가 틀렸다는 뜻이었다.
사무실 복도에서는
누가 내 인사를 받고,
누가 못 본 척하는지
너무 또렷이 읽혔다.
외국에서는 몰랐다.
표정도 어눌하고, 문화도 달랐기에
모르는 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내가 ‘알아차릴 수 있어서’ 더 서러웠다.
점심시간이면 사람들은
낯선 은어와 압축된 유머로 빠르게 웃었고,
나는 그 웃음 속에 낄 수 없었다.
영어보다 훨씬 유창한
내 모국어였지만,
나는 그 언어 안에서
내 자리를 찾지 못했다.
어느 날, 복사실 앞에서
누군가 내게 물었다.
“선배님, 그때 해외 생활 오래 하셨다 했죠?
진짜 외국은 좀 달라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너무 많은 말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의 스마트폰 화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뉴스, 예능, 메신저 대화, 쇼핑몰.
나는 문득,
저 세계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돌아왔다는 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나 자신만이
이 세계가 여전히 나와 비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18장 아버지의 빈자리
부고는
이메일도 아니고 전화도 아니었다.
누나가 보낸
단 한 줄의 문자.
“아빠 돌아가셨어.”
그 문장은 마침표도 없었고,
감정도 없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뉴욕은 비가 왔고,
사무실 책상 위의 커피는 식었다.
프린트기에선
누군가의 보고서가 덜컥거리는 소리로 쏟아졌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장례식엔 가지 못했다.
아니,
가야 할 이유를
스스로 찾지 못했다.
설명은 없었다.
왜 그랬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어떤 마지막이었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 후로도 몇 해가 흘렀다.
어느 날, 정리하다
서랍에서 오래된 가족사진 한 장을 찾았다.
어릴 적 나와 누나,
그 가운데 앉은 아버지.
그 사진 속의 아버지는
나를 안고 있었지만
내 얼굴은 옆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내 삶에서 언제나 ‘무엇인가’였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빈자리에
설명 대신
조용한 점 하나만을 남기고 싶다.
그랬구나.
그렇게 가는 거였구나.
19장 ― 남겨진 관계들
누나와는
연락이 끊긴 적이 없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가끔씩 보내는 이모티콘 하나에
다 안다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
어린 시절,
누나가 나 대신 싸웠던 수많은 장면들이 떠오른다.
화장실 앞에서 나 대신 울고,
새엄마의 시선을 막아주고,
아버지 대신
내 이름을 불러줬던 사람.
오래 지나
누나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각자의 세계를 살아가면서도
그 끈은 느슨하지만
질기게 남아 있었다.
새어머니와 이복동생들과는
한때 한집에 살았지만
지금은
안부조차 묻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전화번호는 있지만,
눌러본 적은 없다.
추억이 없는 관계는
혈연만으로 유지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내가 더 냉정한 사람인가 싶다가도,
곧,
애초에 서로에게 줄 말이 없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관계는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 있는 동안
조금 더 오래 머무는 쪽에 의해 남는 것이다.
그리고 누나는
지금도 내 안에서
어린 시절의 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고 있다.
그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고
가끔은 믿어보게 된다.
20장 ― 다시, 나에게
언젠가부터 거울을 자주 보게 됐다.
누군가를 위해 꾸미는 것도 아니고,
나이를 확인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 어떤 설명도 없이도
내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많은 것을 떠났고,
많은 것에서 도망쳤다.
살아남기 위해,
입증하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그런데 그렇게 멀리 왔지만,
결국 내가 도착한 곳은
어릴 적 나를 닮은 이 사람이었다.
그 아이는
한 번도 날 비난하지 않았고,
한 번도 등을 돌린 적도 없었다.
나는 알고 있다.
나 자신에게 너무 늦게 돌아왔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이 가장 진실한 순간이라는 것도.
책장 위에 정리되지 않은 노트들이
가끔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 안에는
쓰다 만 문장들,
시작하지 못한 제목들,
한때는 중요했던 단어들이
고요히 엎드려 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펴본다.
다시 쓴다.
줄을 긋고,
남긴다.
어느 문장은 기억을,
어느 문장은 용서를,
어느 문장은 그냥 침묵을 위해 남긴다.
그리고
마지막 장의 여백에
이렇게 적는다.
먼 곳에서 온 나에게.
이제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