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나에게

1부: 不在의 집

by 가브리엘


1장. 말해지지 않은 시작


부모가 이혼했다는 말을 처음 들은 날의 기억은 없다.

그냥 어느 날부터, 엄마는 사라져 있었고, 아빠는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누나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지만, 나에게 말해준 적은 없었다.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 줄 알았다.

누군가는 말을 안 하고, 누군가는 울음을 삼키며 밥을 먹고,

어느 밤은 대문 밖에서 고성이 들리다 말고 조용해지는 식으로,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는 조각나 있었다.

아빠가 과외를 하던 집 여자와 엮였다는 말,

엄마가 가출을 했다는 말,

경찰이 다녀갔다는 말까지.


그 많은 말들 속에서, 정작 엄마와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에게 ‘진실’은 없었다.


할머니는 말을 아꼈고,

누나는 세 살 위였지만 마치 어른처럼 굴었다.

“엄마는 아파서 간 거야.”

“조용히 해.”

그 말들이 나를 보호한 건지, 더 멀게 만든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 집의 작은 방에 앉아 있었고,

작은 손으로 퍼즐을 맞추거나,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들으며

소리를 작게 틀어놓고 있었다. 소리는 언제나 작아야 했다.

누군가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의 화를 피하기 위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이미 그때부터 이 집을 조심스럽게 떠나고 있었던 것 같다.

몸은 거기 있었지만, 마음은 늘 다른 곳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른 곳’은 결국, 내가 평생을 걸어 도달한 바로 이곳이었다.


가족은 내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랐다.


2장. 셋이서, 조용히


아침은 늘 따뜻했다.

할머니가 일찍 일어나 밥을 짓고, 누나는 무심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나는 보온병에 든 미지근한 미역국을 마시며, 입 안에서 밥알을 굴렸다.


셋이 함께 앉아 밥을 먹었지만, 말은 거의 없었다.

할머니는 라디오를 켜두었고, 누나는 식사 도중에도 책을 읽었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숟가락을 들었다 놨다 했다.


말이 없었다기보다, 말을 해도 될지 알 수 없는 분위기였다.


집 안엔 엄마의 흔적이 오래 남아 있었다.

옷장 깊숙한 곳에 접힌 스웨터, 고무줄로 묶인 편지 뭉치, 화장대 서랍 속 말라붙은 립스틱.

할머니는 그것들을 치우지도, 보지도 않았다.

‘있는 채로 없는 사람’처럼 두었다.


그게 이 집의 방식이었다.

누가 사라지든, 누가 무엇을 했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밥을 짓고, 빨래를 걷고, 라디오를 틀었다.


나는 그게 어른이라는 것인 줄 알았다.

조용히 사는 것. 감정을 내세우지 않는 것.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것.


그 시절의 나는 울지 않았다.

울면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셋은 그렇게 조용히 살았다.

누나는 빠르게 어른이 되어갔고,

나는 그 틈에서 가능하면 작아지려 애썼다.


소란 없는 삶도, 충분히 시끄러울 수 있다는 걸

나는 그 집에서 배웠다.


3장. 두 개의 가족


어느 날, 집에 사람이 늘었다.


젊은 여자와 두 아이.

아빠는 그들을 “새 식구”라고 불렀고, 할머니는 말이 없었다.

누나는 눈을 피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엄마’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새로 온 여자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 하지 않았다.

대신 늘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조심스러움은 우리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아이들은 활기찼다.

TV를 크게 틀었고, 장난감을 던졌고, 방문을 닫지 않았다.

나는 그 소리가 낯설었다.


우리 셋이 살던 집은 조용했고, 문은 항상 닫혀 있었다.

아빠는 새 아내 앞에서 자주 웃었지만,

그 웃음은 우리 앞에선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 집의 가장이면서, 가장 불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누나가 말했다.

“우린 그냥 같이 사는 거야. 진짜 가족은 아니고.”

그 말이 오히려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 집엔 가족이 두 개 있었고,

그 둘은 끝내 하나가 되지 않았다.


4장. 나만의 방


내 방은 집 안에서 가장 작고, 가장 조용한 방이었다.

햇살은 오후 늦게서야 들어왔고, 겨울엔 유난히 추웠다.

그런데 나는 점점 그 방을 좋아하게 됐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누구도 보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책장엔 도스토예프스키와 헤르만 헤세가 늘어났고, 라디오에서는 김광석과 쇼팽이 흘렀다. 나는 책을 읽고, 음악을 틀고,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현실보다 감정이 더 정직한 곳.

나는 거기서 살았다.


어느 날 새엄마가 아빠에게 말했다.

“애가 말이 너무 없어서 걱정이야.”

나는 들은 척하지 않았다.

걱정이라는 말은 친밀함의 위장처럼 느껴졌다.


그 방은 작았지만,

세상을 막기에 충분했다.


내가 들었던 음악과 읽었던 문장들은, 그 시절의 나를, 대신 울어주었다.


5장. 입시와 탈출


서울대 공대에 합격했다.

누구도 울지 않았고, 누구도 크게 웃지 않았다.

그건 기쁜 일이기보단, 무언가를 종료하는 일이었다.


나는 합격자 명단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이 집을 떠날 수 있겠다.


공부는 도피였다.

내가 이 집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기 위한 수단.

누구보다 빨리 독립하고, 누구의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한 전략.


누나는 “수고했다”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날 밤, 우리는 처음으로 라면을 함께 끓여 먹었다.

많은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 라면 안에는,

어린 시절의 시간들이 아주 작게, 아주 뜨겁게 녹아 있었다.


합격은 해방이었고,

해방은 다시 시작되는 침묵의 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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