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떠남으로 완성되는 나
6장. 결혼, 유학 그리고 멀어짐
미국에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나는 공부가 아닌 ‘떠나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유학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집을 더는 참고 견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라고 말했지만, 속으론 “이제 좀 나 혼자 살고 싶어서”가 진짜 이유였다.
결혼은 빠른 결정이었다.
상대는 착했고, 조용했고,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미국행은 그렇게 ‘유학’과 ‘결혼’이라는 두 개의 합리화로 포장되었다.
출국 당일, 아버지는 공항까지 나와주지 않았다. 새엄마도 바쁘다 했고, 누나는 문자 한 통만 보냈다. 그렇게 의외로 쉽게 오랜 세월 나를 구속했던 공간은 발아래서 작아지고 멀어지고 있었다.
낯선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조용한 해방감을 느꼈다.
비로소 나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직감.
그러나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언어는 벽이었고,
도시는 낯설었고,
집세는 비쌌고,
나는 너무 조용했고,
세상은 너무 빠르게 움직였다.
처음 몇 달은 모든 감정이 ‘배경음’처럼 흐려져 있었다.
눈물도 분노도 없이,
그냥 ‘버티는 것’만이 하루하루의 목표였다.
교수와의 첫 면담에서, 그는 내 이력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You seem to have run far.”
나는 그 말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도망친 걸까? 아니면 찾으러 온 걸까?
아직은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멀어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건 처음으로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7장. 나에게 다다르는 길
그 교수는 유난히 조용한 사람이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눈빛은 명확했으며,
학생들을 대할 때는 마치 고장 난 기계를 만지듯 조심스러웠다.
처음엔 나도 그가 나를 그저 ‘무난한 아시아계 학생’쯤으로 여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내 논문 초안을 유심히 읽었고,
내가 묻지 않은 질문에 답을 줬으며,
내가 피한 문장을 다시 꺼내 물었다.
"You seem to have run far."
그 말이 나를 정지시켰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사실 그 순간, 누군가 내 안을 들여다본 느낌이 들었다.
그날 이후, 그는 나에게 조금 더 말을 걸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조립식 교육을 받았어요.
생각보다 암기를 잘했던 것 같고요.”
“하지만 이건, 네가 처음으로 설계한 문장이다.
그건 암기로 할 수 없는 일이야.”
그 말은 내 안에서 오래 울렸다.
교수는 내 이름을 또렷하게 불러주었고,
발표가 끝난 날에는 직접 손을 내밀며 “Well done”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 이름을 줄이지 않았다.
조금 어색한 억양으로라도,
끝까지 불렀다.
그건 칭찬이라기보다는,
존재로서의 인정을 건네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누군가에게서 인정받기 위해 공부한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빨리 떠나기 위해 공부했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침묵을 배웠다.
그런데 그 사람 앞에서는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영어는 여전히 서툴렀고,
발표 중 문장이 꼬이면 얼굴이 붉어졌으며,
토론 수업에서 내가 꺼낸 말은 늘 중간에 끊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말하려던 뜻은 반듯하게 전해졌다.
내 억양과 단어보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만든 문장, 내가 설명한 그래프,
내가 발견한 질문들로 구성된
‘내 시간’ 안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
그것은 고향도, 가족도, 국적도 아닌
순수하게 ‘나 자신’이라는 장소에서 느끼는
최초의 감정이었다.
멀리 달아나야만 했던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나에게 도착하고 있었다.
8장. 나에게 도착하는 시간
졸업 후, 나는 꿈의 직장이었던 IBM에 입사했다.
그것은 당시로선 최고의 선택이었다.
글로벌 기업, 안정적인 커리어,
내 전공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포지션.
교수는 추천서를 써주었고,
나는 최종 인터뷰에서 차세대 나노패터닝 기술에 대해 유창한 영어로 설명했다.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나는 그제야 "살아남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는 효율적이었고, 시스템은 정교했으며,
동료들은 똑똑하고 예의 바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은 없었다.
내가 설계한 차세대 재료들은 실제 디바이스에 적용되었고, 누군가의 기술 보고서에 들어갔다.
하지만 결과는 내 이름이 아닌,
부서 단위로 기재되었다.
그리고 상사는 늘 말했다.
“좋은 팀워크였어.”
물론 팀워크는 중요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만든 것에 내 이름이 남지 않는 세계에
조금씩 지쳐갔다.
언젠가 복도에서 마주친 상사가 내게 물었다.
“넌 이 일, 재미있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원했던 건,
어떤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는 걸.
다시 바다를 건너기로 한다.
영어보다 더 낯선 언어,
문화보다 더 완고한 질서,
그 안에서 내가 ‘단 하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곳.
일본.
그곳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처음으로 시험해보고 싶었다.
9장.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나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그게 농담인 줄 알았다.
일본 굴지의 기술 기업.
창사 이래 첫 외국인 사업부장 제안.
그런데 그들은 진지했고,
나는 피로했고,
그 조합은 빠른 결정을 이끌었다.
첫 출근 날, 복도에 줄지어 선 직원들이 나를 맞았다.
정중한 목례, 통일된 유니폼, 시간에 맞춰 정렬된 침묵.
나는 어딘가 이상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초반 몇 달은 ‘적응’이 아니라,
균형을 잡는 전투였다.
말은 통했지만, 의미는 자주 어긋났고,
기술은 통했지만, 문화는 닫혀 있었다.
나는 더 조용해졌고,
더 빨리 출근했고,
더 오랫동안 사무실에 남았다.
언젠가 내가 앉아 있는 회의실이
마치 수족관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이름이 일본경제신문 1면에 실렸다.
“최초의 외국인 부서장, 혁신적 구조 개편 단행”
그 기사는 일본어보다 빠르게 한국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전해졌고, 누군가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완전히 올라섰네.”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성공은 소리 없이 내 어깨 위에 올라탔고,
나는 조금씩 굽어졌다.
명함은 무거워졌고,
이름은 선명해졌고,
사람들은 나를 알아봤지만,
정작 나는
점점 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다.
누군가는 내 영어 억양을 칭찬했고,
누군가는 내 한국식 업무 스타일을 칭찬했고,
누군가는 내 일본어의 공손함을 칭찬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어디 사람인지
누구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세계가 나를 알아보기 시작한 순간,
나는 나 자신과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10장. 連続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병실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축복이란 단어는 너무 신앙 같았고,
기쁨이란 말은 입에 붙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이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잘 왔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은 사실,
내가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그는 내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나를 품에 안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존재했고,
나도 그림자처럼 살아갔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아버지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이 더 두려웠다.
아이가 자라면서, 나는 책을 읽었다.
육아서, 심리학, 언어 발달 이론.
논리로 감정을 해결하려는 시도.
그러나 아이는 책대로 자라지 않았고,
감정은 이론보다 훨씬 빠르게 흘렀다.
아이가 첫말을 했을 때,
나는 내 이름이 아니라 “엄마”라는 단어를 들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밤에 아이가 울 때,
나는 종종 일부러 늦게 일어났다.
어떤 날은, 아이가 나를 부르는 게
내 아버지가 나를 부르지 않았던 시간들과 겹쳐져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나는 밥을 해주었고,
책을 읽어주었고,
침대 옆에 앉아 노래를 틀어주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둘째가 태어났고
집 안에는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침묵이 공존했다.
언젠가 아이가 내게 물었다.
“아빠는 아빠한테 혼난 적 있어?”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혼나진 않았지만, 혼자 울었던 적은 있어”
라고 말했다.
아이는 “그게 더 슬퍼”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아이 앞에서 아주 작게 눈시울이 젖는 걸 느꼈다.
나는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가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사랑을 시도해 보는 일이었다.